내가 이 친필 수필집을 저자한테 직접 증정받기는 2009년 2월 23일 그 출판기념회서다.
에세이스트 오문자씨는 재일교포 2세
남편이 저 유명한 역사학자 이진희 선생이다.
이 만남이 있은지 3년 뒤인 2012년 4월, 이 선생은 불귀하는 객이 되었다.
이 부부를 만나 나눈 대화는 아래와 같이 기사화했다.
<사람들> 재일사학자 이진희씨 부부
2009-02-26 16:53
부인 오문자씨 자전 에세이 '아버지, 죄송합니다'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두어 시간가량 계속된 조촐한 '출판기념회'에서 올해 여든 살인 남편은 줄담배를 피워 댔다.
부부가 함께 선 기념사진을 찍자는 요청에 남편은 8살 아래인 부인을 가리키면서 "오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니까 이 사람만 찍으면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거듭된 요청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부인과 나란히 자세를 잡긴 했으나 활짝 웃는 부인과 달리 남편은 내내 굳은 표정만 지었다.
투박한 경상도 억양이 여전한 재일교포 1세인 남편에 비해, 재일교포 2세로 한국말이 그다지 유창한 편이 아닌 그의 부인은 한국어로 의사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일본어를 섞어 쓰곤 했다.
부인 오문자 씨 앞 자리에는 '아버님, 죄송합니다'라는 표제가 찍힌 한국어판 자전 에세이집이 놓였다. 이번 한국어판 출간에 즈음해 출판사인 도서출판 주류성 최병식 대표가 서울 여의도 모 음식점에서 마련한 작은 출판기념회에 노부부가 일본에서 입국하자마자 참석한 것이다.
이 자리를 축하하기 위해 이 부부와는 수십 년째 친분을 쌓아온 이원홍 전 문화부 장관이 참석했다. 이 전 장관은 오문자 씨의 남편과는 동갑이다.
남편을 지칭할 때는 일본여인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꼬박꼬박 '주인'(主人)이라고 깍듯이 예우하는 부인과 달리 누가 봐도 남편은 영락없는 완고한 경상도 남자였다.
"부인께 너무 강압적이지 않는가?"라는 지적에 남편은 한사코 '반기'를 들면서 "텔레비전 채널은 이 사람에게 있지 내게 있지 않다"는 말로 반박하기도 했다.
남편은 또 "이번 책에도 이 사람이 무슨 유교적 가부장이나 되는 것처럼 나를 묘사한 듯한데, 내가 실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노부부는 요즘 NHK에서 방영 중인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한국 드라마는 꼭 함께 시청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 드라마를 애청하는 까닭을 남편은 "(드라마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예절을 차리는 모습이 너무 좋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KBS 사장을 역임하기도 한 이 전 장관은 "맞아요.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라고 해서 부인이 남편에게, 남편이 부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장면이 너무 흔하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파안대소하기도 했다.
이 남편이 1971년 광개토왕비문은 아시아 대륙 침략에 혈안이 된 일본 군부가 변조했다고 '폭탄선언'을 한 그 유명한 재일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씨다.
이씨는 이 자리의 주인공이 분명 부인이라고 강조했지만, 모임은 시종 그가 이끌어 갔다. 그러면서 부인의 이번 한국어판 수필집 표제에 실은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 사진은 내가 찍은 것인데 1959년 12월 일본 니가타 항을 출항하는 북송선을 환송하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사진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북송선은 2척입니다. 이 사람(부인)은 이 배에 타고서 환송 음악회를 열었는데 그 장면이 사진에 담겨 있습니다.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믿고 저 배에 탄 사람 중에는 제가 가르친 제자도 있었습니다. 북한이 지상낙원인 줄 알았고, 김일성이 위대한 지도자라고 믿은 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회한은 줄곧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두 부부는 이른바 '전향자'에 속한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사회 교사들을 교육하는 조선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0년 마침내 사회주의를 버린 이씨는 물론이고, 부인 오씨 또한 혹독한 시련기를 보냈다.
이씨는 "제가 빨갱이라고 해서, 김해 녹산(지금은 부산에 편입) 제 본가는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6.25 때 돌아가신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 임종도 저는 할 수 없었습니다. 모국에 아예 들어올 수도 없었지요. 이 사람 또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가져온 비극적 가족사가 있습니다"
이번 수필집 '아버님, 죄송합니다'는 다름 아니라 이데올로기 때문에 아버지까지 버려야만 했던 부인 오씨의 가족사를 정리했다.
남편처럼 북한과 김일성을 맹신한 오씨는 조총련 간부로 활동하다가 1차 북송선 파견 이듬해인 1960년 북한을 방문했다가 그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북한은 결코 '지상낙원'이 아님을 고발하는 책까지 자비 출판한 아버지와 절연하고 이후 10년 동안이나 연락을 끊었다.
이때 일을 오씨는 "아버지의 저서는 귀국사업에 찬물을 끼얹는 충격적인 고발로 반향을 불러 일으켜, 당황한 조총련은 아버지에게 '반동' '민족반역자'라는 낙인을 찍고 격렬한 비난 캠페인을 벌였다"고 회상했다.
이 일로 오씨는 아버지와 절연하고 그 충격으로 그의 아버지는 술로 날을 지새우다 뇌일혈로 쓰러지기도 했다.
오씨 부부가 다시 친아버지이자 장인을 만난 것은 남편 이진희씨가 조선대학을 떠난 직후인 1971년 봄이었다.
이런 가족사와 이제는 이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오씨는 두 눈을 훔치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끝)
(2017. 2. 16)
***
저 만남이 있은 3년 뒤인 2012년 4월, 이진희 선생은 타계했다.
2012.04.16 21:16:53
'광개토왕 비문 일제 변조' 사학자 이진희 별세
(도쿄=연합뉴스) 김종현 특파원 =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의 일제(日帝) 변조설을 제기한 재일 사학자 이진희(李進熙) 와코대(和光大) 명예교수가 별세했다.
16일 일본 언론에 의하면 이 명예교수는 폐암으로 투병하다 15일 사망했다. 향년 82세.
재일 한국인 1세인 이 명예교수는 고대 한일 관계사 연구의 선구자로 1972년 `광개토왕릉 비문의 수수께끼'라는 논문에서 일본의 광개토대왕릉 비문 변조설을 제기해 한일 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준 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당시 일본이 광개토왕릉 비문의 훼손된 부분에 석회를 발라 새로운 글자를 넣어 변조했음을 지적하고 이를 알고도 역사적 통설로 몰고 간 일본 역사학자들의 저의를 비판했다
광개토대왕비의 정밀 검증을 통해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이 서기 4세기 후반 한반도를 공격해 백제와 신라를 정벌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반박한 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 김해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사학부를 졸업하고 조총련계 학교인 조선고등학교와 조선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1년 조선대학을 사직하면서 조총련과 결별했다.
그는 1984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계간 청구」창간(1989),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 설립(1989) 등을 통해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 한일관계사 연구에 매진했다.
저서로는 '조선 문화와 일본', '광개토왕릉비의 연구'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 등 다수가 있다. [2012.04.16 송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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