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위 조절하느라 무척이나 애를 먹은 기고문이 나왔다.
올해가 문무왕 수중릉 발굴 오십주년이라 해서 신동아 의뢰로 관련 글을 초해봤다.
동아일보에서 일하다가 이 잡지로 파견나간 권재현 기자가 좋은 자리를 주선했다.
1967년 5월 16일 한국일보는 문무왕 수중릉인 대왕암을 발견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그 직후 다른 신문도 같은 보도를 했지만, 엄밀히 이는 발견이 아니라 '재발견'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의 재발견인가?
지금의 대왕암이 문무왕 수중능이라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고려시대 이래 죽 그랬다.
나는 문화재로서의 재발견이라고 본다.
수중릉은 자연히 주어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에다가 문화재라는 가치를 주입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은 소위 발견 직후인 1967년 7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지정을 가능케 한 동인이 1967년 5월 15일 대왕암 직접 조사였다.
한국일보가 주관한 신라오악조사단이 대왕암으로 가서, 정영호 선생을 포함한 3명이 빤스 바람으로 장대 들고서 바닷물로 뛰어들어 깊이를 쟀다.
장대가 한없이 들어가니, 대왕암 한가운데 바위 밑에는 암혈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암혈이 문무왕 혼령이 드나드는 용혈로 간주했다.
그러고선 모식도를 그렸으니, 그것이 아래 사진이다.
이를 토대로 해서 대왕암은 문무왕 해중릉으로 재발견되고 당당히 극일의 표상으로써 당시 시대정신을 충실히 구현한 기념물로 재발견되었다.
이 과정은 한국 내셔널리즘의 표상 그대로다.
이후 시간이 다시 흘러 2001년 역사스페셜이 진짜로 바닷물을 막고 파헤졌더니, 뿔싸, 대왕암은 우리가 생각한 그 대왕암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내가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의 고충도 감안해야 했으며, 그 시대정신을 찬양하거나 동조하지는 못할지언정 고려는 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면 아래로 최대한 숨기면서 그런 대로 하고 싶은 말은 했다고 본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아! 이렇게 해서 나는 또 하나의 신비를 벗겼을까?
모르겠다.
(2017. 2. 21)
***
문제의 기고문이다.
발견 50주년 문무왕 수중릉은 실재인가 신화인가?
아래 글도 참조하라.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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