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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내가 말하는 내 박사논문 《관방체계를 통해 본 고구려의 국가전략 연구》 by 신광철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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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습니다. 오늘 뒤늦게 우체국을 방문해 사전접수라는 좋은 시스템을 이용해 겨우 우편 발송을 끝마쳤습니다.

다행히 상반기에 큰 사업이 없어서 우야부야 마무리했지만, 하반기 사업 때문에 논문을 다시 펼쳐볼 여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펼쳐보기 두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아마 이렇게 올 연말까지 또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갈테고, 그러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졸업 연한이 다 차서 부랴부랴 졸업 준비를 하다 보니 그저 아쉬움만 남는 것 같습니다. 박사논문 처음 정리할 때만 해도 그동안 썼던 글들 모아서 분량 채우고 중간중간 연결고리만 잘 정리하면 되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초고를 작성해서 일단 행정 처리를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논문 지도해주신 선생님들께 지적받은 사항들을 보고, 다시 한번 제 글을 읽어보니 논문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썼던 논문들과 발표문들은 제 고집에 가까운 주장이었고, 그로 인해 그 반대편에 있던 연구 성과들을 못 보고 놓치는...아니 외면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 부분들까지 하나둘씩 살펴 보다 보니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공력과 시간이 투자될 수 밖에 없었고, 기존의 견해가 수정됨에 따라 초반에 복붙했던 글들까지 전면적으로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머릿 속에 맴도는 생각들과 정리되지 않은 자료들은 쌓여갔고,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신 부분도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채 겉돌기 일쑤였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조금만 더 있었으면이라고 매일 후회하면서도 뭔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그동안 진짜 공부를 안 했구나~라는 생각을 매일 했습니다. 나름 일하면서, 공부하면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따 보니 제대로 손에 잡히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안 했으면서 그동안 발표하러 다니고, 논문을 투고하고 했다니...

박사논문 쓰면서 얻은 것이 있다면 학문적인 성과보다는 지난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박사논문을 더 빨리 썼더라면 이런 것들을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에라도 그런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10년이라는 제한이 없었다면 아마...박사논문을 더 늦게 썼을지도, 안 썼을지도 모를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신경 써 주셔서 많이 부족하지만 박사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2010년에 쓴 제 석사논문 주제는 <한강유역 고구려 관방시설을 통해 본 고구려 남부전선 주둔부대의 성격과 군사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남부전선이라는 개념에 대해 고민하면서 몇 편의 글을 썼습니다. 이후 남부전선의 개념을 확장해서 서부전선, 북부와 동부 영역까지 살펴봄으로써 고구려 전체의 국가전략 연구를 박사논문 주제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구 범위가 상당히 넓어지게 되었고, 고구려 전기간을 통시대적으로 살펴볼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수박 겉핧기식으로 가볍게 다루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주제에 맞추어 연구 범위를 다듬을 필요가 있었고, 서부전선과 남부전선에 집중해서 논지를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북부와 동부는 전선이라고 할만한 경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략하게 다루었지만, 고구려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곳이 아니기에 추후 이에 대해서 보완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주장했던 몇 가지 이슈에 대해서는 논지를 보강하고, 기존과 달리 생각이 바뀐 부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관련 연구가 증가함은 물론, 각지에서 고고자료가 증가했기 때문인데 아마 이런 점이 문헌사학과 다른 고고학의 묘미이자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에라도 잘못 생각했던 부분들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된 점도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사항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고구려 초기 국가전략과 '양맥'

양맥에 대해서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단순히 유리왕 때 정복한 소수민족? 고구려가 몇 번 승전한 전장? 정도로만 이해했는데, 고구려 초기 국가 전략에 있어서 양맥은 상당히 중요한 군사전력이자 군사요충지를 대변하는 존재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양맥을 확보함으로써 고구려가 국초 서쪽 경계에 대한 유연한 대처가 가능했다고 이해하였습니다.


2. '신성'과 고구려 초기 성곽

신성은 고구려 동북에도, 서북에서 존재했던 군사상 요지인데, 고구려가 각지에 신성이라고 불리는 중진을 확보함으로써 기존과 다른 방어체계, 영역의 개념 등이 변화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문헌과 달리 4세기 이전으로 편년 가능한 고구려 성곽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초기 성곽은 존재했으며, 성곽을 기반으로 한 전략 · 전술도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초기 성곽이 인공성벽이 아닌 험지를 선별해 천연성벽에 의존한 성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추후 이른 시기 고구려 성곽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면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인공성벽이 아닌 천연성벽으로 둘러싸인 험지를 고구려가 산성으로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습니다.


3. 남도와 북도, 전연과 고구려의 전략

4세기 중반 고구려에 있었던 2개의 교통로는 이미 관련 연구가 너무 많았는데, 그중 제가 의문이었던 부분, 생각을 달리 해서 접근할 부분 등에 대해서 일부 다루었습니다.

남도와 북도의 경로, 신성 및 목저성에 대한 부분도 다루었고, 환도성이 약탈당하던 시점의 전황 등에 대해서 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고구려의 북연 도성 용성 약탈, 백제 도성 한성 공함과 비교했을 때 모용황의 환도성 함락도 단기간에 이루어진 작전이 아니라고 보았고, 이를 기준으로 당시 전황을 이해하였습니다.


4. 광개토왕과 장수왕대 영토 확장의 개념

광개토왕대 사방으로 다수의 적을 굴복시켰지만, 실질적인 영토의 확장은 장수왕대 완성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광개토왕은 국내 지역은 물론 평양과 황해남도를 영역화하고, 각지의 경영을 안정적으로 이룩했기 때문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보았으며, 장수왕대에 고구려 각지에 수백 개의 성곽이 축조되면서 관방체계가 구축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영역이 확장된 뒤에 넓어진 영역을 경영하기 위한 안정적인 거점이 일거에 다수 필요했던 점, 장수왕 재위 기간 내내 대내외적으로 안정기가 수십 년간 지속된 점(장수왕 이후 그와 같은 안정기가 찾아오지 않았던 점도 포함), 태왕가 인식과 천하관 확립 등 고구려 천하관 및 국토관에 대한 개념이 확립된 점 등을 근거로 보고자 하였습니다.


5. 고구려의 남부전선 경영 방식

기존에는 점-선으로 이루어진 간접지배를 기본으로, 일부 거점(중원지역)에 대한 영역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박사논문을 쓰면서 기존 견해를 전면 뒤집어 영역지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한성-웅진-사비기 수혈유구 및 목곽고의 분포 양상에 대해 살펴본 선행 연구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확보하여 재활용한 백제의 거점은 모두 다수의 수혈유구 및 목곽고가 존재했던 곳으로 주변의 타 거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량의 저장시설들이 있던 곳이라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장수왕은 한성 공함 후 한성과 몽촌토성 등에서 백제 각지의 공문서 및 담당 관리를 확보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우선적으로 백제 각지의 물자가 집적되는 거점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장기적인 남부전선 경영을 위한 자원 확보를 위해 초반에 전선을 급속하게 확장시켰고, 그 형태만 보고 고구려가 점-선 형태의 간접지배를 이루었다고 이해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는 최근 증가하는 고구려 관련 고고자료가 뒷받침하고 있고, 관련 자료가 추가된다면 더 뚜렷하게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 남평양과 한성

기존에는 황해도 장수산성과 신원 도시유적을 고구려 남평양으로 이해했는데, 박사논문에서는 이곳을 한성으로, 남평양은 별도로 한강 북안에 있었던 곳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남부전선 경영 방식을 간접지배가 아닌 직접지배, 영역지배로 이해하면서 그와 관련해 기존 견해가 수정된 사항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중랑천 일대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목마장 유지로 이해됐던 아차산장성을 남평양과 관련해서 이해하였습니다. 아마 이 성벽도 축조형태나 기법으로 봤을때 고구려가 초축했을지, 이미 백제가 초축해 썼던 곳인지(북한성?) 모르겠지만 이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에는 중곡동 고분군에 대한 이해도 한몫 거들었습니다.


7. 삼국사기 지리지의 고구려 군현

삼국사기 지리지에 남은 고구려의 흔적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구려 군현의 형태가 어떤 식으로든지 흔적을 남긴 결과물이 지리지의 지명이 아닐까 하며, 이를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고구려의 남부전선 경영 방식과 한강 유역 영유, 지리지의 고구려 군현 등이 모두 한줄로 연결된 목걸이처럼 줄줄이 엮어 있다는 점인데, '간접지배-한강 유역 백제 점유-지리지의 군현은 믿을 수 없다'는 쪽의 주장의 근거가 '빈약한 고구려 고고자료의 근거'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시각으로 논지를 전개하였습니다.


대략 이와 같은 방향으로 논지를 전개했는데, 기존에 고구려사를 공부하면서도 고구려에 대해 의도적으로 너무 축소적인 시각, 소극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주장하려는 바가 100% 객관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만, 제 스스로가 무언가 틀에 갇힌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했습니다.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더 많은 글입니다.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한 글이기도 하고요. 단, 이는 제 논문을 심사해주시고 지도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과는 무관하며, 오직 제가 이를 제대로 다 소화하고 이해하지 못한 탓일 겁니다.

그래서 그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과 함께 죄송하다는 마음도 같이 전달하고 싶습니다.

추후 이를 보완할 연구가 언제쯤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조속한 시일 내에 더 다듬어서 여러 선생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할 계획입니다.

다시 한번 박사논문이 나오기까지 돌봐주시고 조언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가르쳐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 전해드리며, 이 감사한 마음 영원히 잊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제 옆에서 부족한 신랑 챙기느라 여념이 없는 울색시한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고마운 분들께 일일히 인사드려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한 점 사죄드리며, 추후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두 인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근자 신광철 군이 《관방체계를 통해 본 고구려의 국가전략 연구》라는 방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고려대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고고학 전공으로 제출해 통과하고는 그 시꺼먼 인쇄본을 보내왔으니

보니 그 두꺼비한 논문 책으로 600쪽에 달하는 거질이라, 뭐 읽어 볼 염두가 없던 차에, 남들도 읽지 아니할 것을 염려한 때문인지 지 스스로 지 박사논문을 요약해서 소개했기에 그것을 전재한다.

신 군은 저 대학 학과를 졸업하면서 그 학과 교수 이홍종이 채린 발굴조사단에 좀 오래 봉직하다가 색시를 만나면서 나 이제 공무원 할끼다고 선언하더니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 셤에 턱 하니 붙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일하게 되었더랬다.

그 학예사는 조건이 좀 이상해서 경주박물관 근무 연한이 정해진 것으로 아는데, 그 의무복무기간에 느닷없이 고구려 유적 파던 친구가 신라 적석목곽분을 파게 되어 어리둥절 둘레둘레하는 모습을 보았거니와, 그 모습을 보고는 신라고고학으로 전직하라 했지만, 이쪽엔 내 잘났다 설치는 이가 박물관 안팎에 많아 그 시집살이가 싫었는지 고구려로 돌아가 저 방대한 학위논문을 완성했다.

논문 쓰느라 고생했다는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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