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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신라 가옥은 7세기까지 굴립주 건물이었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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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 파키스탄을 엄습한 홍수에 침대를 옮기는 장면이 애처롭다.


이는 근자 간행된 신라사학회 기관지 《신라사학보》 37집에 기고한 이은석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실장의 논문 '7세기대 신라 가옥구조에 관한 고찰' 성과 결론이다.

이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저자 말마따나 이에 대한 심각한 고고학적 고민이 없거나 태부족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논문은 의의가 있다.

두번째로 굴립주堀立住 건물이었다는 결론이 미칠 파장이다.

굴립주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별도 기초 시설이나 초석 없이 그대로 나무 기둥을 박아서 만든 집을 말한다.

이런 굴립주 건물은 그 기초가 남기가 쉽지가 않다. 특히나 경주 분지처럼 잦은 홍수로 가옥 지대가 침수되고, 나아가 그에 따른 재건축이 빈발한 지형에서 굴립주 건물은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굴립주 건물은 저런 지형에서는 기초를 남기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 지금 경주 분지 지대 발굴하면 바로 땅밑에서 신라시대 유구가 튀어나온다. 풍납토성이 문화층 4미터 이상, 한양도성 내부가 5미터 이상인 점과 사뭇 다르다.

굴립주 건물은 재건축에서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요새 농어촌 옛날 집 생각해봐라. 저거 뜯고 새로 지으면 기초가 남을 것 같은가?
현재 드러나는 고고학적 흔적만으로 그것이 모든 문화층을 대변하는 것인양 떠드는 행위 지양해야 한다.

이것이 고고학의 기본이지만, 한국고고학은 입만 열었다 하면 증거제일주의라,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대서 무턱대고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내가 늘 말하듯이 내 고향 김천만 해도 근 30년래 잦은 태풍 홍수에 마을 지도가 완전히 뒤바뀌고 강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몇십 년 전에만 해도 마을이었던 곳이 지금은 강물이 흐른다.

고고학이 만능 아니다. 고고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이 고고학의 만능으로 이해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고고학하는 자들이 양심선언을 해야 한다.

난 본 것만 말을 하지, 보지 않은 데 대해서는 입 다물어야 한다. (2016. 9. 19)

***

저에서 말하는 굴립주堀立住란 일본에서 수입한 왜색倭色 완연한 용어로 콩글리시에 해당하지만 어이한 셈인지 간도배알도 없는 한국고고학이나 한국고건축에서는 그런 말을 쓰야 있어 보인다 생각함인지 남발한다. 간단히 말해 박은기둥이다.

보통 집을 지을 적에는 바닥 다짐을 하고, 특히 기둥을 놓을 자리에는 적심積心이니 주초니 해서 별도 받침 다짐시설을 하고는 그 위에다가 기둥을 세우지만, 굴립주란 그런 시설 없이 그대로 기둥을 박은 것을 말한다. 하니 이런 굴립주 건물은 실상은 다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겉모양만 보면 전봇대를 땅속에 박은 듯한 모습이다.

기둥은 그때 콘크리트를 썼을 리 만무하고 나무라, 단점은 빨리 썩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집은 자주 갈아엎어야 한다. 일본에서는 이세신궁 건물을 이런 방식으로 20년 단위로 쏵 교체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고 보니 기둥 다짐시설로 주초를 얹어놓고자 그 밑에 까는 돌다짐 시설을 적심이라 하는데, 저 놈의 적심도 그 정체가 아리숑숑하다. 저건 어디서 굴러먹다온 개뼉다귀인가? 고래古來로 사용한 말인가? 일본말 찌꺼긴가?

저와 비슷한 주장이 내 기억에 의존해서 자신은 없지만 수원대 교수 양정석한테서도 있지 않나 한다.

그래서 침대는 과학인가???

맨바닥에 간단한 이불 같은 거 깔고 자는 일은 자칫 입이 돌아간다. 침대를 쓰면 맨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차단 혹은 감쇄하는 효과가 있으니, 보온이란 측면에서 아주 유리하다 하겠다.

온돌은 이걸 갈아엎은 혁명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문제도 적지 아니해서 무엇보다 산림을 거덜내고, 화재 위험성도 그만큼 높아졌다.

저 글을 쓸 당시 이은석은 부여연구소 실장이었지만 나중에 나중에 해양문화재연구소로 가서 거기서 과장하고 얼마전까지 나주문화재연구소장인가를 하다가 느닷없이 일본에서 공부 좀 해보겠다 해서 1년 예정으로 휴직 유학을 간 것으로 안다.

아무튼 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좀 더 상론한 글이 있으니 참고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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