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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현판 글씨 쓰다 백발이 된 중장仲將 위탄韋誕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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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삼국시대 중반에 해당하는 중국사 남북조시대 남조南朝 왕조 중 하나인 유송劉宋 시대 황족 일원 유의경劉義慶이 엮은 일화 모음집 《세설신어世說新語》 중 교예巧藝 제21에 세 번째로 수록된 일화가 다음이라


위중장은 글씨를 잘 썼다. 위 명제가 궁전을 세우면서 편액을 달고는 중장을 시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글을 쓰게 하고자 했다. (중장이 일을 마치고) 내려오니 머리카락과 귀밑머리가 허애졌다. 이 때문에 자식들한데는 다시는 글씨를 배우지 말라고 했다.

韋仲將能書. 魏明帝起殿, 欲安㮄, 使仲將登梯題之, 旣下, 頭𩯭皓然, 因敕兒孫, 勿復學書.



사다리 타고 바구니 담겨 올라 대롱닥롱 매달려 현판을 쓰는 위탄 by 여송은




다 쓰고 계우 내려왔지만 머리카락과 귀밑머리가 허옇게 변하고 만 위탄 by 여송은



이것이 《世說新語》 본문이다.

이 일화 주인공 위탄韋誕(179~253)은 자를 중랑仲將이라 하는데, 저 이야기에서는 본명 대신 字로 등장한다.

경조군京兆郡 두릉현杜陵縣,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장안구 일대 출신으로 저명한 서법가이며 이른바 경조 위씨京兆韋氏 가문 소속이다.

태복太僕 위단韋端의 아들이면서 위강韋康의 동생이다.

무도군武都郡 태수太守가 되었다가 건안建安 연간에 낭중郎中이 되었고 조위曹魏 정시正始 연간에는 시중侍中 중서감中書監을 거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치사하고는 가평嘉平 5년(253)에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저 《世說新語》 는 본래 본편보다 소량蕭梁시대 유효표劉孝標라는 사람이 주석한 판본이 더 유명해서, 예컨대 진수의 원판《삼국지三國志》보다 배송지가 주석한 《삼국지주三國志注》가 더 유명한 것이랑 비슷하다.

유효표가 주석한 《세설신어주世說新語注》를 보면 저 일화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있다.


《문장서록》에 이렇게 말했다. 위탄은 자가 중장이라 경조 두릉 사람으로 태복정 위탄의 아들이다. 문재가 있고 글을 잘 지어 광록대부로 졸했다.

文章敘録曰: 韋誕字仲將, 京兆杜陵人, 太僕端子. 有文學, 善屬辭, 以光祿大夫卒.

위항의 《사체서세》에 이렇게 말했다. 위탄은 해서에 뛰어났는데 위 나라 궁전과 누관은 대부분 위탄이 쓴 것이다. 명제가 능소관陵霄觀을 세울 때 (사람들이) 잘못해 (글씨도 쓰기 전에) 먼저 편액을 달아버렸다. 그래서 위탄을 바구니에 담은 채 밧줄에 도르래를 달아 끌어올려서는 쓰게 하니 지면에서 25장이나 떨어졌기에 위탄은 몹시도 무서워 떨었다. 그리하여 자손들에게 그 해서의 필법을 그만두라고 경계하고는 그것을 가훈으로 삼았다.

衛恒四體書勢曰: 誕善楷書, 魏宫觀多誕所題. 明帝立陵霄觀, 誤先釘㮄, 乃籠盛誕, 轆轤長絙引上, 使就題之去地二十五丈, 誕甚危懼, 乃戒子孫絶此楷法, 箸之家令.



위항衛恆(?~291)은 서진西晉시대 서법가書法家라 字를 거산巨山이라 하며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하현夏縣인 하동河東 안읍安邑 사람이다.

벼슬은 황문시랑黃門侍郎에 이르렀다가 혜제惠帝 때 가후賈后 등에게 피살되었다. 조부 위개衛覬, 아버지 위관衛瓘, 질녀 衛鑠 역시 모두 저명한 서법가였다.

그에게 《사체서세四體書勢》 1권이 있으니 서법이론서로 그 원문은 《진서晉書·위항전衛恆傳》에 저록되었다.

다만 분량이 워낙 적어 이것이 원본은 아닌 듯하며 초록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다.

이 주석들을 통해 우리는 기술이 너무 간략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세설신어》 이해를 한층 높이게 된다. 주석은 언제나 그 제일 목적이 당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맥락 보충, 더 간단히 말해 소통이다.

저 주석들을 통해 첫째 우리는 위탄이라는 사람이 서법, 곧 요샛말로 서예로 유명했음을 더 보강하며, 둘째 그가 쓰다가 개고생한 편액이 능소관이란 건축물임을 확인한다.

이 일화는 동아시아 현판 문화사에서 중대한 증언을 포함한다.


첫째 적어도 삼국시대엔 궁궐 같은 이른바 권위건축은 그 이름을 적은 현판이 있었다.

둘째 그 현판을 당시엔 방榜이라 표현했다.

셋째 다른 서법이 있었는지 모르나 현판은 편편한 나무판에다가 붓으로 글씨를 썼다.

넷째 그 현판은 미리 글자를 쓴 다음 건물에 걸었다.

다섯째 그 편액은 당대를 대표하는 서법가 글씨였다.

여섯째 그 편액은 여러 서체 중에서도 해서를 썼다.


이를 작금 춘배가 오도방정하는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시대 궁궐 현판 출품작들과 비교하면 셋째와 다섯째에서 미서한 차별이 있다.

저 특별전 출품작은 서법에서 글씨를 돋을새김하거나 칼로 판 두 가지로 대별하며 그런 조작없이 그냥 평판에 단순히 붓글씨만 쓴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위탄이 쓴 현판도 부조나 음각일 가능성을 내치진 못하나 이 경우는 그가 위탄이 아니라 해도 기술자 아무나가 사다리 타고 올라 색칠만 하면 되었을 것이므로 아무래도 위탄은 능소관이라는 현판을 직접 붓글씨로 썼다 봐야 한다.

이 글씨를 쓸 때 줄과 간격 크기까지 맞춰야 했으니 위탄은 극도의 긴장에서 작업했을 것이며 그것이 하도 고통스런 일이었기에 머리까지 백발이 되었고 그 일에 열받아 자식들더러는 너흰 글씨 공부는 다시 하지 말라 했겠는가.

내친 김에 광화문 현판은 돋을새김이거나 음각 둘 중 하나여야 하는데 지금 걸린 것도 그렇고 새로 제작할 것도 그냥 평판에다 붓글씨를 쓸 것으로 아는데 이는 맞지 않다.

틀림없이 돋을새김하고 거기다 금칠을 입혔을 것이다.

이 점을 현판 복원에서 고려했음 싶다.

덧붙여 위진남북조에선 당대 명필이 글씨를 썼지만 조선시대에 와선 이런 점들이 고려되긴 했지만 그 서법가가 다양해져 심지어 경복궁 중건 때는 무인들이 썼으니 이는 아무래도 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판 글씨는 열라 커서 이른바 대필大筆을 썼으니 비실비실한 문신 중에 대필을 휘두를 만한 이가 많지 않았다.

또 현판은 거개 해서였으니 그 점이 세설신어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해서가 서체 표준이었음을 말한다.

현판은 소통이다. 누구나 알아봐야 하는 알림간판이라 다른 글씨체는 가뜩이나 문맹율 99프로를 헤아리던 그 시대에 가독성을 더 떨어뜨리는 다른 서체를 쓰기는 곤란했다.

하긴 누구나 보고선 대뜸 알아봐야 하는 간판을 초서나 행서 전서로 쓰야겠는가? 해서나 예서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조선시대 현판엔 어필御筆이라 해서 왕이나 세자 글씨가 더러 있지만 이건 실은 대단한 위험을 노출한다.

어필이라 하는데 졸렬하면 얼마나 개망신인가?

이 개망신을 일거에 쓸어버린 이가 영조다. 영조는 당대 제일의 학자였고 당대 제일의 명필이었다.

그의 어필 무수 현판은 실은 시위요 자랑이었다.

누구도 당대 그의 학식과 글씨를 뛰어넘을 이가 없었다.

왕이 똑똑하면 신민이 개고생한다.

자고로 리더는 멍청해야 하면 더 중요하게는 멍청하면서도 신하들이 하는 일을 간섭 말아야 한다.

영화 사도에 보이는 폐부를 찌르는 말..

왕은 무엇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신하들이 결정한 것을 윤허하는 자리

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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