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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수세보원 목활자본 두 쪽을 골랐다.
이에서만 用자가 8군데 쓰였다. 하나씩 본다.
살펴보니 새김이 다 다르다.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보통 조선시대 목활자본을 보면 필체가 크게 다르지 않다.
동일 자본字本으로 각刻을 하거나, 한 사람이 쓴 뒤 각수刻手가 각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 사진처럼 같은 글자가 자체가 다른 것은 조판을 위한 목활자를 여러 곳에서 조달하여 사용했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저 책을 찍은 시점이 1901년 광무 5년 시절인데, 한지 종이질이 좋지않은 것과 활자가 다 다른 것을 보면, 인쇄의 수요가 생각보다 많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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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본래는 구석기 돌뺑이 전공이나 일찌감치 한국과학기술사 전반으로 보폭을 확장한 국립대전과학관 윤용현 박사과장 선생 글인데 전재하며 편집과 문투를 내 맘대로 손질했다.
원의는 단 한 군데도 손대지 않았다.
필자는 8군데 사용됐다 했지만 노안으로 하나는 빼묵고 고작 일곱개밖에 소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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