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서남해안 땅끝마을 전남 해남에 방산리 장고봉고분이라는 삼국시대 무덤이 있다. 정확한 지점은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 721번지라 이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지도 한 장이 저 무덤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딱 길목이다. 서남해안을 관통하는 수로 길목이면서, 그렇게 바다를 통해 오가는 물자가 육상으로 상륙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간단히 견주건대 저곳은 경부고속도로로 치자면 추풍령휴게소다. 저 길목을 딱 지키고선 삥을 뜯어먹고 살았다.
만든 시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한반도 주도권을 쥐기 위한 치열한 쟁투를 벌이던 6세기 어간이라, 무엇보다 이 무덤은 구조가 조금은 독특하다는 점에서 이채롭거니와
시체를 묻는 공간은 둥근 흙을 덮어 봉긋이 쌓아 올리되, 그 앞짝에다가 대체로 사각형에 가까운 편평한 운동장 같은 단을 만드니, 그 모양이 공중에서 내려다 보면 열쇄구멍을 닮아 영어로는 흔히 이런 무덤을 keyhole-shaped tomb라 하는가 하면,
또 악기로 보면 천상 딩가딩가 두들겨 장단을 맞추는 장고長鼓를 닮았다 해서 한국 고고학도들이 요새는 장고분長鼓墳이라 부르기도 하니
저 중에서도 장고분이라는 말은 실은 문제가 적지 않아, 이 말은 액면 그대로는 장고라는 악기를 묻은 무덤이라는 뜻으로 혼동될 여지가 다분하다. 굳이 저 말을 살리고 싶거든 한자식 조어造語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장고형고분長鼓形古墳 혹은 장고식고분長鼓式古墳 정도라 해야 할 성 싶다.
이는 결국 고고학이 설정한 일본사로는 이른바 고분시대古墳時代라 해서 4세기 어간에서 6세기? 어간에 걸치는 시대 일본 열도에 등장하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독특한 고분 양식을 말하니, 전방후원분이란 말 자체가 앞쪽은 네모나고 뒤쪽은 둥근 모양 무덤이라 해서 이리 부른다.
한데 일본 열도에서 유행하는 이런 무덤이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호남 일대에서 더러 산발로 발견되기도 하니, 내가 최근 자료를 섭렵하지는 못했지만, 현재까지 보고된 이런 무덤이 대략 20기 안쪽인 것으로 기억한다. 저 해남 방산리 장고분이란 것도 이 모양으로 생겨 먹었고, 무엇보다 그 크기가 전방前方이랑 후원後圓을 다 합쳐서 남북 길이 80미터가 넘는 대형이라, 당연히 이만한 무덤을 쓸 만한 사람은 당시 떵떵거리고 살았다고 봐야 한다.
저 전방후원분이라는 말이 일본 색채가 짙다 해서, 국내 고고학도들이 지어낸 말이 장고분이라는 말이라, 뭐 이름을 바꾼다 해서 일본 색채가 없어지는 것도, 없앨 수도 없다. 그 용어가 무엇이건 저런 무덤 존재는 여차하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과 맞물릴 여지도 있다 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거니와
좆또 그런 논리라면, 일본열도 곳곳에는 한반도계 무덤과 한반도계 유물이 그득그득하니, 일본열도는 북부 일부만 제외하고는 한반도 삼한이 각지에 건설한 식민지라는 이른바 삼한분국설을 제창한 북한 역사학도 김석형 주장은 빼도박도 못하는 팩트가 된다. 삼한분국설은 하나의 학설로서, 식민잔재 청산을 극복하기 위한 파천황 같은 학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야지 그것을 팩트로 보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저 고분은 일찍이 1984년 당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재직 중이던 문화재관리국 출신 강인구가 발견하고 이듬해 발간된 《천관우 선생 환력 기념 한국사 논총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論叢》이라는 단행본에다가 그가 투고한 '해남 장고산고분 조사海南長鼓山古墳調査'라는 논문을 통해 학계에 공식 데뷔한다.
1986년 2월 7일, 전라남도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된 저 무덤은 2000년 도굴이 발생함에 따라, 직후 국립광주박물관이 발굴조사에 착수해 간단한 시굴조사를 벌였으니, 이때 무덤 내부까지 뚫고 들어가 그 구조까지 확인했거니와, 그 개요는 이 박물관이 이듬해에 펴낸 《해남 방산리 장고봉고분 시굴조사 보고서 海南 方山里 長鼓峰古墳 試掘調査 報告書》로 정리되었다.
광주박물관에 의한 조사는 2000년 8월 28일 이래 동년 9월 26일까지 한달 정도 걸렸으니, 뒤쪽 원형 봉분 북쪽에서 발견된 발견된 함몰 지점이 도굴 흔적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니, 조사 결과 이쪽만 아니라 그 서쪽에서도 도굴 구멍이 드러났다. 북쪽 도굴갱은 길이만 11m 정도로 달했다. 이놈들이 혹시 탄광 인부 출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다.
문제는 도굴이 이 무렵에 자행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연도부라 해서 무덤방으로 통하는 무덤길 천장은 이미 수십 년전에 뚫렸으며, 이때 조사 빌미가 된 북쪽 지점 도굴구멍은 당시 기준으로 7~8년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됐다.
무덤방인 현실玄室은 그 구조 정도만 확인하고 그 바닥에선 철기 조각과 작은구슬 2~3개를 확인했지만 수습하지는 않았다.
그런 무덤을 이번에 제대로 팠다. 아주 쏵 뒤져서 샅샅이 조사했으니, 해남군 의뢰로 재단법인 마한문화연구원(원장 조근우)가 발굴기관으로 선정되어 2020년 10월 23일 이래 이듬해 3월까지 팠다.
해남군이 표방한 조사목적은 세 가지였으니 첫째 이 무덤에 대한 학술적 규명, 둘째 이 무덤이 위치하는 북일면 일대 고분군의 국가 사적 지정문화재 승격 자료 확보, 셋째 보존정비방안 수립 및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이 그것이다.
자세한 조사성과는 추후 다른 자리를 보겠다. 그에 대한 개략적인 언론보도는 다음 우리 공장 기사를 참조바란다.
국내 최대 장고형 고분 학술대회…'한일 고대사 비밀 풀리나'
해남 방산리 장고봉고분 축조세력 파악 등 귀중한 사료 확보
이번 발굴조사 성과를 조사단은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1. 해남 방산리 장고봉 고분의 정확한 규모가 파악되었다.
확인된 분구의 전체 길이는 75m, 방형부 길이 35m, 방형부 최대 너비 35m, 원형부 지름 39.6m, 방형부 높이 9m, 원형부 높이 8.3m이다. 또 주구를 포함한 고분의 규모는 82m이다.
2. 석실 상부 전체를 회색점토로 완전하게 밀봉한 밀봉토가 확인되었다.
석실 상부를 초가지붕 형태로 80cm 이상 밀봉하여 석실 내부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완벽하게 방지하였다. 점토를 이용하여 석실 상부 전체를 완전하게 밀봉한 첫 사례로, 이 점토는 고분에서 남동쪽으로 약 650m 떨어진 지점에서 채취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3. 고분 축조와 관련한 제의행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
현문 문비석 아래에서 개배 10세트가 확인되었는데, 이들 토기는 현문을 폐쇄한 후 행한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개배 1점 내부에서는 조기과로 판단되는 생선뼈 1개체가 확인되었다. 연도부에서 제의와 관련된 유물은 함평 신덕고분, 나주 복암리고분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또한 백제 무령왕릉 연도에서도 석수, 지석, 오수전, 청자양이호 등이 확인되어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4. 고분의 축조와 관련한 구체적 공정과 특징이 파악되었다.
장고봉고분의 축조 공정은 크게 ① 분구 평면기획 및 정지작업, ② 주구 조성, ③ 분구성토 및 묘광구축, ④ 석실 축조, ⑤ 분구성토 및 분구 완성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분구의 평면기획 과정에서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고대高大하게 보이기 위해 주변을 300cm 이상 절토切土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최종 단계인 분구성토 과정에서 석실의 상부와 원형부의 가장자리를 우선 단단하게 성토한 후 그 내부는 채워 넣어 분구를 완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타 고분의 축조방법과 구별되고 있다. 한편 원형부를 먼저 완성한 후 방부方部를 덧붙여 축조하였다.
5. 완벽한 구조의 석실이 확인되어 이를 활용할 방안이 요구된다.
방산리 장고봉고분은 3차례의 도굴로 석실 내부의 유물이 모두 사라지기는 했지만, 석실 구조는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안전조치를 마련한 후 일반인들이 석실 내부로 진입하여 관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1~4번은 이른바 학문이라는 측면에서 이 무덤이 지닌 특징 혹은 가치를 정리한 것이다.
나는 저것들은 버린다. 그건 고고학도 너희나 먹고 살라 하고, 내가 정작 주목하며 담대하게 평가하는 대목은 5번 활용 측면이라, 내부를 개방하자는 제안에 적극 찬동하며 부디 저와 같은 구체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돌이켜 보면 학술 연구를 표방하며 파헤친 무덤이 대체 몇 곳인가? 수십 만기에 이른다. 하지만 왜 파는지를 파는 놈도 몰랐다. 말이야 그럴 듯하게 포장해서 우리 문화 원류를 찾니, 고대문화 성격을 파악하느니 했지만, 파는 게 능사였고 거기에 재미를 붙였을 뿐이다.
다 파제끼고는 그림 그리고 유물 몽땅 끄집어 내고 박물관에 쳐박아두고는 우리 할 일 다 했다고 자랑하고 떠벌리고 다녔다.
왜 파는가? 보여주지도 못할 것을 왜 팠단 말인가?
문화재는 공공재다. 그것을 누려야 할 사람은 그 공공재를 가능케 하는 절대의 바탕이다. 그 절대의 바탕은 국민이며 시민이다. 시민이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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