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관제官制에서 내성사신內省私臣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우선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을 적출하면 다음과 같다.
1.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평왕본기에 이르기를
44년(서기 622) (봄) 2월,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았다. 일찍이 즉위 7년에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세 곳에 각각 사신私臣을 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한 사람을 두어 세 궁宮의 업무를 겸하여 관장하도록 한 것이다. [四十四年 春正月 王親幸皇龍寺 二月 以伊飡龍樹爲內省私臣 初 王七年 大宮梁宮沙梁宮三所 各置私臣 至是置內省私臣一人 兼掌三宮]
이로 보아 내성사신內省私臣은 內省之私臣, 곧 내성이라는 관부官府를 관장하는 사신私臣임을 추찰한다. 이 대목에 정구복·노중국·신동하·김태식·권덕영 《개정증보 역주삼국사기3 주석편(상)》(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40쪽. 2012)은 아래와 같이 주석한다.(이 신라편은 권덕영 주석 아닌가 한다.)
내성은 궁정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으로 경덕왕대 일시 전중성(殿中省)으로 개칭되었다. 사신은 각 궁의 장관이었으나, 이때 와서 3궁을 통합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내성메만 사신이 두어졌다.(본서 권39 잡지 직관 中 내성 조 참조)
2. 삼국사기 권 제39 잡지雜志 제8 직관職官 中에 이르기를
내성內省은 경덕왕 18년(759)에 명칭을 전중성殿中省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 명칭으로 회복했다. 사신私臣 1명을 두었는데 진평왕 7년(585)에는 세 궁에 각각 사신을 두었다. 대궁大宮은 대아찬 화문和文, 양궁梁宮은 아찬 수힐부首肹夫, 사량궁沙梁宮은 사찬 노지弩知가 맡았다. 44년에 이르러 한 사람이 세 궁을 동시에 관리하게 하였다. 관등은 금하衿荷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 중에서 적임자로 인정되면 이 벼슬을 주었으며 임기 제한은 없었다. 경덕왕 때 이 명칭을 전중령殿中令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신이라 하였다. 경卿 2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아찬까지이다. 감監 2명을 두었는데 관등은 나마로부터 사찬까지이다. 대사大舍 1명, 사지舍知 1명을 두었다. [內省 景德王十八年 改爲殿中省 後復故 私臣一人 眞平王七年 三宮 各置私臣 大宮 和文大阿飡 梁宮 首肹夫阿飡 沙梁宮 弩知伊飡 至四十四年 以一員兼掌三宮 位自衿荷至太大角干 惟其人則授之 亦無年限 景德王又改爲殿中令 後復稱私臣 卿二人 位自奈麻至阿飡爲之 監二人 位自奈麻至沙飡爲之 大舍一人 舍知一人]
이는 신라 정부를 구성한 관부 중 내성內省과 그 최고 장관 사신私臣을 요약한 설명이다.
이것 말고 내성사신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장하는 데가 있는지, 내가 자신은 없으나 실상 이것이 전부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내성과 내성사신에 대한 탐구는 이 둘을 절대기반으로 삼아 전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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