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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낮도깨비 윤응렬尹應烈 대감집이 윤웅렬尹雄烈 별서가 된 사연

by taeshik.kim 2023.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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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렬의 부암동 별장에 대한 중앙일보의 소개 기사를 보았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5/0003255994?sid=103&fbclid=IwAR1X0dz17afoZnIi58n18Q6Nijo0EoBHJVoDMkNGI6xJEd3aT6scDKdPReQ


이 집은 1977년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될 당시 <부암동 윤응렬 대감가>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향우측의 한옥만 지정되어 있었다.

난 '윤응렬'이 누구인가 궁금했다.

그래서 다른 문화재들과 마찬가지로 이 집에 대해서도 사료들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그 결과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사료조사 내용과 현장을 대조한 끝에 이 집의 역사와 성격은 완전히 새롭게 정립됐다. 그 결과는 2006년 7월 6일자의 고시문 속에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다.

내가 쓴 조사보고서는 이 집의 복원공사에 자문한 한 문화재위원에게 제공되었다. 그 분이 내 보고서를 가지고 논문을 썼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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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현 서울공예박물관장 글이다.

서울시 문화재과(?)에서 근무하던 시절 일화를 적시한 것으로 왜 바뀌게 되었는지를 증언한다.

서울시민속자료 제12호가 부암동付岩洞 윤응렬尹應烈 대감가大監家에서 2006년 7월 6일 서울시 고시를 통해 반계磻溪 윤웅렬尹雄烈 별서別墅가 된 사연을 밝힌 것으로, 해당 문화유산이 제자리를 찾게 된 사연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윤웅렬은 누구인가?

저 고시문을 추리면, 윤웅렬(1840~1911)은 그 유명한 윤치호의 아버지로 대한제국 시대에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냈다. 이 별서는 도성에 유행하던 성홍렬猩紅熱(scarlet fever)을 피해 지내기 위해 당시 도성 밖 경승지로 꼽히는 창의문 밖 부암동에 조성한 별장이다.

1906년 6월에 착수해 이듬해 3월 이전에 완공한 2층 벽돌조 서양식 건물이 본래 이 별서 주축이다. 그러다가 그의 사후 셋째아들 윤치창尹致昌이 상속받아 안채를 비롯한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하면서 지금의 별서가 완성되었다.

1977년 지정 당시에는 서양식 건물은 제외했지만, 이를 포함하고 한옥 건물들까지 3동을 한꺼번에 지정함으로써 별서가 제위치, 제자리를 찾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윤응렬尹應烈 대감가大監家라는 정체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당시 조사자가 동네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윤웅렬을 잘못 알아듣고 저리 적었다고 한다.

별서 역시 집의 일종이며, 나아가 윤웅렬이 대한제국 시대 대신을 지냈으므로 대감가라는 표현이 썩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윤웅렬이 윤응렬로 둔갑함으로써 낯도깨비가 태어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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