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美室은 이에 (아들인) 하종공夏宗公에게 풍월주 지위를 전하도록 하니, (보리)공菩利公은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이 풍월주가 되었으니 건복 8년(591) 정월이었다. (보리가 풍월주 취임과 더불어) 서현랑舒玄郞을 부제副弟로 삼았다.
서현랑은 (진흥왕과 사도思道 딸인) 아양공주阿陽公主 아들인데 영특하고 통달한 기풍이 있어 (할머니인) 태상태후太上太后(지소只召)가 아끼니 (풍월주 재임 당시) 하종공에게 명하여 전방화랑前方花郞을 삼도록 하고, 건복 2년(585)에는 (보리)공과 더불어 우방화랑右方花郞이 되었다. (그러다가) 건복建福 5년(588) 하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리)공을 부제로 삼고 서현랑을 우방대화랑右方大花郞으로 삼아 공에게 속하도록 했다. 이에 이르러 (보리)공이 서현랑을 부제로 삼고 용춘공龍春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았다.
그때 (만호태우 딸인) 만룡萬龍의 형 만명萬明은 나이가 들었지만 혼인을 허락받지 못한 상태로 서현랑과 사(통)私通하였다.
만호는 본래 (서현 엄마인) 아양阿陽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하여 (혼인을) 불허하고는 공에게 명하여 용춘공을 서현랑에 대신토록 하니 서현 또한 그 지위를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만명의 정과 사랑은 더욱 굳어져 몰래 서로 도망하여 (서현을) 만나곤 했다. 만호는 이에 만명을 가두고 서현을 만노萬弩로 내치려 하니, 만명이 탈출하여 함께 도망했다.
(만호) 태후는 더욱 노하여 벌을 주려했지만 (사위인 보리)공과 (딸인) 만룡이 힘써 태후의 노여움을 풀어 무사하게 되었다. (화랑세기 12세 보리공)
15세 유신공은 서현 각간角干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인데 곧 만호태후의 사녀私女로,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인데, 또한 입종立宗 갈문왕의 아들이다.
처음 만명과 서현이 야합하여 임신하였는데 태후는 서현이 대원신통류大元神統流이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만노로 도망하여 무릇 스달 만에 (유신을) 낳았는데 꿈의 상서로움이 많았다.
(같은 만호태후가 어머니인) 진평대왕은 사매私妹가 괴로움을 받자 서현공을 만노에 (태수로) 봉하였다.
공은 자라자 태양 같은 위용이 있었다. 태후가 보고 싶어하여 돌아올 것을 허락하여 보고는 기뻐하며 "참으로 내 손자다"고 했다. 이로써 가야파가 마침내 받들었다.(화랑세기 15세 유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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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김서현과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이다. 그의 동생이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 전쟁에서 영웅적 활약을 일삼는 김흠순이며 이들의 여동생 문희는 나중에 김춘추와 연결되어 김법민, 훗날 문무왕으로 추봉되는 아들을 낳는다.
김유신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저 서현과 만명이 겪은 간난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이를 그렇다는 근거는 눈꼽만큼도 없었는데, 가야계 가문에 대한 신라 정통 권력의 견제라는 그럴 듯한 추측이 정설처럼 군림했다.
하지만 실상은 전연 딴판이라, 권력투쟁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 투쟁하는 사람들은 남성들이 아닌 왕실 여성들이었다.
김서현 어머니는 아양이니, 다름 아닌 진평왕과 사도부인 소생인 정통 공주였다. 그는 귀화한 금관가야 왕자 김무력과 혼인해 김서현을 낳았다.
반면 만호태후는 진흥왕과 사도 부인 아들인 동륜태자의 부인으로 그 아들 진평이 즉위하자 권력을 주물렀다.
그러므로 아양과 만호는 시누이와 올케다.
그런 두 사람이 쉽게 화합하지 못한 이유는 족보가 달랐기 때문이다.
아양은 모계로는 멀리 왜倭 왕실에 뿌리를 두는 대원신통인 반면, 만호는 조문국에 뿌리를 두는 진골정통眞骨正統이었다.
조문이냐 왜냐 이 쌈박질에 서현과 만명은 하마터면 관계가 쫑이 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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