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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너무 잘난 형을 둔 흠순欽純 (4) 지방 떠돌며 전쟁만 기다리는 동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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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대첩을 대승으로 이끌고 화려하게 귀환한 형과 아버지를 한없이 부러운 듯이 바라보며 분을 삭이지 못한 흠순은 춘추의 뒤를 이어 대권을 거머쥐어 제19대 화랑이 되긴 했지만, 의욕상실증에 걸리고 말았으니, 낭정郎政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교단 운영은 패대기치고는 짐을 싸고는 부모 형님, 그리고 그 절세가인 마누라한테 빠이빠이 나 댕기온데이, 오데 가는지는 묻지 마레이, 서늘해지마 돌아오겠구마 하는 말을 남기고는 표연히 길을 나섰으니, 그렇다고 그가 따로 갈 데를 정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런 점에서 그는 방랑객 김삿갓 대선배이기도 했다. 

마침 그때가 한반도는 전쟁의 시대라,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들도 전장에서 공을 세우기 좋아하는 시대 흐름이었으니 그 현상을 흠순공 전은 이렇게 말한다.

“대개 그때 사람들이 공 세우기를 좋아하고 선도仙道를 탐구하지 않았는데, 공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화랑을 일명 풍월주風月主라 하는 데서 엿보이듯, 화랑과 그 무리는 본래 음풍농월하는 신천사도 오두미도 계열 도교 교단이었고, 그것이 바로 저에서 말하는 선도仙道라,


내도 쌈박질하고 싶데이



하지만 시대가 일변해 그들 사이에서도 이미 반세기 전 설화랑과 문노 시대를 고비로 해서 교단이 분열되었으니,

그 고유한 우주 청기를 호흡하고자 하는 오두미도 정통 계열은 설화랑을 따랐으니 이들을 구름 위의 삶을 지향한다 해서 운상인雲上人이라 하며,

반면 문노를 따르는 무리들은 무사 군인 기질이 짙어 무공을 세우기를 좋아하니 이들을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호국선護國仙, 약칭 국선國仙이라 했다. 

저 설화랑 문노 시대 역시 삼국이 첨예하게 전쟁에 돌입한 시대였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시간이 흘러 제2차 대전大戰이 일어나자, 풍월주 교단에서도 모두가 군인 기질로 흘러갔으니, 호국선 국선의 전성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이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실은 그의 형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열다섯에 화랑이 되었다가 18세에 국선이 되었다. 이런 변화를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화랑이나 국선이나 같은 말인 듯한데 어쩌다가 김유신만 유독 화랑이 먼저 되고 나중에 국선이 되었을까? 기록의 착란이라 여기곤 했으니, 아리숑숑한 이 미스터리가 화랑세기 출현 이후 비로소 풀렸다. 

국선과 화랑(풍월주)은 본래 한 몸이었지만, 설화랑-문노 교단 분열 이후 지향을 달리하는 한 뿌리 두 가족이었던 것이다.

이 둘을 김유신이 겸장했으니, 그러면서도 나중에는 호국선이 되었으니, 당시 시대상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하겠다. 

이야기가 옆길로 샌 감이 있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흠순을 보자.

오로지 전공을 세워 출세하고픈 욕망으로 그득한 이 동생은 풍월주로 4년을 재위했지만, 그 일을 잘하고픈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으니,



걸리기만 해 바레이



오로지 그의 머리와 가슴은 내가 형보다 모자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도 전장터 나가서, 나도 적장 머리를 베어 나도 화려하게 개선하고 싶다는 출세욕으로만 들끓을 뿐이었다. 

“이로써 공의 재위 4년 동안 한결같이 낭정을 돌보지 않은 채 낭도들을 거느리고는 지방에서 머무르니 부제副弟인 예원공禮元公이 낭정을 대행했다.”

이리 그의 열전은 말한다.

예원은 앞서 보았듯이 그에게는 처남이었다. 처남매부가 낭정은 다 말아드신 셈인데, 매부는 지방만 싸돌아다니며 오로지 전쟁이 터지만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가 지방을 싸돌아다녔다 했지만, 그 지방은 보나마나 백제 혹은 고구려와 변경이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야 전쟁이 터지면 여차하면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헤집고 다닌 흔적 중 일부가 울진 성류굴 같은 데 남았으니, 이들은 극기훈련 한답시고 동굴에서도 생활하며 뱀도 잡아먹고 종유석도 갈아마시곤 했던 것이다.



스폰이 있어야 해



해병대? UDT? UDU? 흠순은 그 민간  의용대를 이끈 대장이었다. 

예서 궁금증 하나. 지방으로만 떨거지들 데리고 싸돌아 댕기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터, 아무리 지역 토호 삥을 뜯는다 해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 뻔하고

무엇보다 그에 따른 원성이 자자할 터, 그걸 아버지나 형이 용서할 수는 없는 법, 그렇다고 아버지나 형한테 손을 벌렸다가는 맞아뒤질 것이 뻔하고 처가집에 손을 벌리기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자금은 어찌 마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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