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 정상 암반을 뚫은 지하궁전
두 무덤은 비슷한 시대에 만들었으며, 더구나 부부를 매장했으니 대체로 비슷한 구조였다. 간단히 말해 산 정상 암반을 가로로 뚫고 들어가 死者들이 생전에 常居한 생활공간을 그대로 흉내 내 묘실을 만든 지하궁전이라 할 수 있다.
북한군이 휴전선 근처에 팠다는 땅굴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내부는 암벽 동굴 특유의 을씨년스러움이 더하다.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애묘崖墓’, 즉 암반 절벽을 파고 들어가 만든 무덤의 일종으로 간주하지만, 이들 무덤이 조성되던 비슷한 시기에 주로 지금의 중국 사천성 일대에 유행하는 전형적인 崖墓와는 격을 현격히 달리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후대 불교 도입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유행하는 석굴石窟에 가까우니, 적절한 비교 사례가 될지 자신은 없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사례를 굳이 든다면 석굴암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더불어 이를 요즘의 고고학에 통용하는 무덤 양식으로 보건대 옆쪽에 墓道를 마련한 ‘횡혈식橫穴式’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두 무덤은 평면도로 생각하면 흡사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같은 맹금류, 혹은 두 팔을 양쪽으로 펼친 채 큰 大자 모양으로 쭉 뻗은 사람을 연상케 한다.
즉, 동쪽으로 입구를 마련하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아래로 깊어지는 묘도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끝나는 지점 양쪽 벽면에 단면 ∩ 모양으로 깊이 파고 들어간 공간을 만나니, 이를 사람 얼굴에 빗대어 귀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해서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이실耳室이라 부른다.
두 이실은 동-서 방향으로 마련한 묘도와는 직각을 이루니, 당연히 남쪽에 있는 것을 남이실南耳室이라 하고, 그 맞은편은 동이실東耳室이라 해서 구분한다.
이실을 지나면 묘실로 연결하는 통로인 용도甬道가 나오고 이를 통과하면 前室에 해당하는 中室이 나타나고 이어 後室로서 墓主를 안치하는 主室이 마침내 등장한다.
이렇게 두 능묘는 墓道-耳室-甬道-前室-後室의 5개 구성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
현지 유적 안내판에 의하면, 전체 규모는 1호묘인 劉勝墓가 全長 51.7m에 내부 가장 넓은 곳 폭이 37.5m, 가장 높은 곳이 길이 6.8m에 달하며, 竇綰墓는 全長 49.7m에 가장 넓은 곳 폭 65m에 최대 높이 7.9m에 이른다.
내부 총면적은 유승묘가 2천700㎥ 정도로 3천㎥인 두관묘에 비해 약간 작다. 내부 폭에서 두 고분 차이가 큰 것은 뒤에서 설명하듯이 後室(主室)의 위치 차이에서 비롯된다.
묘도는 흡사 거대한 땅굴이다. 검은색이 완연한 암벽을 2천여 년 전에 이처럼 거대하게 뚫은 사람들이 신기할 정도다. 다이너마이트도 없었을 텐데, 모조리 망치와 끌로만 쪼아 팠단 말인가?
현장 설명문에 의하면 유승묘 묘도는 총길이 20.63m에 폭 2.2~4.1m, 높이 4.5m라 한다. 거대한 터널인 셈이다.
양쪽 벽면에는 군데군데 물이 흘러내리는데 암벽 특유의 검은색과 어우러지면서 기괴한 장면을 연출했다.
두관묘 묘도는 유승묘보다 약간 길어 全長 28.7m에 아래쪽을 기준으로 폭 3.3~4.5m에 높이 3.5~4.95m에 이른다.
두 묘도 모두 천장은 아치형에 가깝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낮아지는 이른바 사파형斜坡形이다.
두관묘를 기준으로 입구 쪽과 맨 안쪽 표고 차이는 2.1m라고 한다. 묘도 입구는 발굴 당시에 둘 다 전돌과 철문으로 봉쇄했으며 묘도 내부는 土石을 섞어 채운 상태였다고 한다.
墓道가 끝나는 지점에 그 양쪽 벽면을 곧장 파고 들어가 만든 또 다른 거대한 암벽 동굴인 耳室이 나타난다.
耳室은 서로를 마주한 상태로 각각 두 군데를 만들었다고 했으니, 두 고분 모두 발굴 결과 용도는 비슷해 한쪽에는 마차와 말을 안치한 데 견주어 그 맞은편에는 음식물을 저장하는 활용했다.
한데 그 용도에서 두 고분이 정반대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 대단히 흥미롭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상술한다.
두 고분의 耳室은 모두 양쪽 벽면은 수직에 가깝지만, 천장은 아치 형태다. 현장에는 실제 유물을 다 수거했으니 발굴 상태를 기준으로 그 모형 전시를 하는 중이었다. (2016.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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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상술한다. 고 했지만, 내가 할 이야기는 이걸로 충분하고, 또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는 이것으로써 근거가 받침되었다 생각하므로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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