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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

노비의 숫자와 양반

by 신동훈 識 2026.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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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말엽에는 그야말로 간신히 먹고 사는 하층 사무라이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포지션이 우리나라 딱 향촌 중인 정도 된다. 자신도 사무라이 (양반)라는 자의식이 있지만, 부업 없이는 생활이 안되니 퇴근 후에는 집에서 새장이나 돗자리를 짜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중엽까지도 우리나라 향촌에는 

양반이 많게는 수백 명씩 노비를 거느리고 있으며

이런 양반이 한 마을에 여러 명 있는 있는 것이 포착된다. 

이들이 바로 그 마을 대부분 토지를 점유하고 노비를 사역시켜 농사짓는 사족들로, 

이들은 이 노비와 토지를 근거로 심지어는 과거 급제 없이도 

대대로 유학 이상의 직역을 안정적으로 받으며 사족으로 동네에 군림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당쟁이 수백 년에 걸쳐 장기간 지속되며 

불이 꺼지지 않고 내연한 것도 바로 이때문으로, 

당쟁에서 패배한 족속들도 향촌에 가지고 있는 토지와 노비만으로도 

충분히 존속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이 대과는 하지말고 생원진사까지만 하라고 했다고 하고, 

몇 대에 한 번씩 생원 진사만 내고도 향촌의 유종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러한 막대한 토지와 노비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향촌에 보면 노비를 데리고는 있는데 

겨우 5-6 명 정도 간신히 데리고 있는 집안도 있으니, 

이런 집들은 사족으로 대대로 존속하는 것도 힘겨운 집안으로, 

대개는 향촌 중인이라고 하면 바로 이들을 말한다. 

물론 향촌 중인이 반드시 재산 정도와 비례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조선 중 후기의 향촌 사회는

특히 19세기 이전까지는, 그 동네에서 토지와 노비를 집적한 수준이 

바로 신분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터라, 

노비 5-6명 정도 데리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이들은 안정적인 사족이 아니라 향촌의 중인에 해당하며, 

양반 사족으로 대대로 존속하기에 힘겨운 이들이라 하겠다.

이렇게 양반 지위 재생산에 있어 경계선상에 있으므로, 

이들은 조선후기 당시 양반으로부터는 멸시를, 

사회적으로는 양반도 아니고 평민도 아닌 희안한 존재로 남는 것이니, 

이 당시 노비 5-6명이라면, 그 당시의 생산성으로 볼 때, 

아마도 노비에서 전적으로 농사를 맡기기에는 힘이 부쳐

그 자신도 뭔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쉽게 말해 반농민반사족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을 바이니, 

평민들처럼 전업 농민은 아니더라도, 

생활을 위해 노비에게 농사일을 전부 맡겨둘 수 없는 상황일지니, 

김홍도 그림에서 보이는, 노비 5-6명 타작 시켜 놓고 그 자신은 딩굴딩굴 노는 일은

매우 쉽지 않았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에도 에도시대에는, 

하급 무사들이 워낙 박봉으로 생활이 안 되어 

낮에 번의 업무를 하고 퇴근해서는 집에서 새장 만들기 등 부업을 해야 먹고 살수가 있었다고 하니, 

노비 5-6 명 거느린 조선의 사족이란 딱 일본의 하급 무사의 생활, 그 정도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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