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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유럽의 미라와 인류학

누가 외치를 죽였는가: 유럽 최초의 살인사건 전말 (3)

by 초야잠필 2019.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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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서울의대 생물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정상 부근에서 발견된 이 불행한 사망자를 끌어내리기 위한 작업은 곧 시작되었다. 도대체 언제 사망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행정 절차상 이 작업 책임자는 당연히 법의관이 맡게 되었다. 몇 명이 함께 올라가 외치 주변 얼음을 녹여가며 조심조심 그를 빙하에서 들어냈으며 외치 주변에 혹시 이 사람의 유류품으로 볼 만한 것이 없는지 샅샅이 찾았다. 



이때 그 주변에서 찾아낸 유물 위치가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를 보면 알겠지만 발견한 유물들이 요즘 것이라고는 보기 힘든 것들 뿐이었다. 왠 구리도끼가 나왔고 화살대로 보이는것을 주웠다. 어쩌면 이 케이스는 법의학 케이스가 아니라 고고학 케이스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외치를 조사하는 인스부르크 대학 연구자들 (1998년). 이때만 해도 외치는 지금의 대접을 못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헬리콥터로 운반하여 산꼭대기에서 끌어내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옮겨졌다. 인스부르크는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도시이지만, 사실 20세기 전만 해도 이곳은 오스트리아 남부, 이탈리아 북부를 아우르는 전체 “티롤”지역의 수도와 같은 도시였다. 티롤은 원래 남독일계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독일인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1차대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티롤 남부지역은 당시 승전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에게 넘어가 버렸다. 말하자면 독일의 알사스-로렌과 같은 상황의 지역이었다 할 것이다. 


티롤 지역. 현재는 인스부르크가 있는 북쪽 지역과 볼차노가 속한 남쪽 지역이 각각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나뉘어 있지만 원래는 공통의 문화를 간직한 지역이다. 


남티롤이 이탈리아에 넘어가버리면서 티롤은 오스트리아에 속한 북티롤과 이탈리아에 속한 남티롤의 두 지역으로 “분단”되게 되었다. 외치가 발견되었을 당시까지만 해도 이 케이스는 5,000년이나 된 미라가 아니라 법의학 케이스로 다루어졌으므로 티롤 수도격인 인스부르크로 시신이 운반되어도 남티롤에서는 항의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고마와 했을지도..) 

인스부르크 대학에 옮긴 시신은 곧 이 대학 연구자들이 조사할 기회도 갖게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이 케이스가 단순한 법의학 케이스가 아닐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때 이 대학 고고학부 교수 콘라드 스핀들러 (Konrad Spindler)는 시신과 함께 발견되어 운반된 유물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아는 한 이런 종류의 유물이 사용된 시기는 유럽의 순동(chalcolithic) 시대. 5,000년 전에나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콘라드 스핀들러가 쓴 외치 연구사. 외치가 어떻게 발견되고 연구되었는가 하는 초기 연구사가 담담한 필치로 씌어져 있다. 국내에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고 아마존에서 영문판은 지금도 쉽게 구할수 있다.

공룡을 연구하는 학자가 항상 발굴현장에서 뼈다귀만 보다가 어느날 느닷없이 살아 있는 공룡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당연히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듯이 (실제로 주라기 공원이라는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발굴 때나 접하던 유물을 느닷없이 알프스 정상 부근에서 조난당하여 사망한 사람 유류품에서 보게 된 고고학자 심리도 이해가 간다. 이 케이스가 어쩌면 생각보다 엄청나게 오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주라기 공원의 한 장면. 

이 후 외치가 5,000년 전 알프스 꼭대기에서 사망한 유럽인의 가장 오래된 조상 미라로 확인되고 이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할 때 까지 벌어진 해프닝은 책으로 한권 묶을 정도다. (실제 책으로 나왔다). 이 과정에서 관련된 많은 이의 욕망과 질투, 이기심은 실제로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몇 가지 이야기만 재미삼아 해보자. 외치가 유럽 순동시대 미라라는 것이 알려진 후 이 미라가 실제로 엄청난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 후 많은 분쟁이 뒤따랐다. 이 미라를 처음 발견한 독일인 부부는 죽을 때까지 미라를 발견한 보상금을 넉넉히 받아내기 위한 소송으로 세월을 보냈다. 

미라를 처음 운반해 간 북 티롤과 남 티롤 지역은 외치 소유권 문제를 놓고 한판 싸움을 벌였다. 남티롤-볼차노가 수도이다- 지역 주장은 외치가 사실은 북티롤이 아니라 남티롤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소유권은 이탈리아 남티롤 쪽에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인스부르크 대학에서 이미 외치를 열심히 조사하던 북티롤 쪽이 이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을 리가 없다. 

이런 분쟁이 나온 이유는 알프스 산 능선 지역은 마치 우리나라 옛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백두산 정계비 분쟁 지역처럼 분명한 경계가 그어졌던 것이 아니고 말뚝을 어느 간격마다 박아 놓고 이 말뚝 사이 직선 경계-라는 식으로 국경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외치가 발견된 지역이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영토 어느 쪽이었는가 하는것은 결국 항공사진 판독으로 외치는 이탈리아 쪽으로 100미터 정도 더 들어간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승. 

현재 외치가 발견된 곳에 남아 있는 기념물


이대로 분쟁이 끝이 났으면 좋겠지만 그 다음은 이탈리아 중앙정부와 남티롤 사이에도 싸움이 벌어졌다. 5,000년 전 사람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럽인 시신 중 가장 오래된 외치를 남티롤 시골 촌구석에 쳐박아 놔서 되겠는가? 중앙의 번듯한 박물관에 옮겨놔야 한다는 주장이 당연히 나왔다. 남티롤 정부도 당근 결사 반대. 

우여곡절을 거쳐 외치는 남티롤 수도 볼차노에 안치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물론 그때까지 진행하던 인스부르크 대학 연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 주기로 한 것은 나름 신사적 타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외치에 대한 강연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던 인스부르크 대학 사람들은 불만이 컸다고 하는데 어찌되었건 볼차노로 외치가 옮겨진 날은 축제와 같았다고 한다. 

볼차노 시는 외치를 보관하기 위한 전용박물관을 마련하였고 여기에 외치와 함께 발견한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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