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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다산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by 초야잠필 2023.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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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다산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산 폄하가 아니다. 아래에 간단히 생각을 요약해서 써둔다.

문: 그렇다면 다사는 대학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답: 대학자가 맞다. 그것도 퇴계, 율곡 다음으로 들라면 그 저술의 방대함이나 완성도로 볼때 당연히 대학자로 추앙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문: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답: 다산이 대학자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에 국한할 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산은 당시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가 소속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이미 18세기말-19세기초에는 동아시아에서도 "이류"가 되어 있었다.

비단 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우리가 그래도 유교경전이라면 좀 상황이 다르지 않았나 싶게 여기는 소위 동양학 인문학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산이 활동했던 시기에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의 문물 수준이 "이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최고였다고 한들 크게 평가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문: 다산은 봉건적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의 단초를 연 사람인가?

답: 도대체 뭘보고 그런 소리가 횡행하는지 모르겠지만, 다산 정도의 이야기는 진지한 유학자라면 다들 했던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이다.

다산은 근대적 사상의 씨앗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적합한 위치라면 조선 유학의 내재적 발전의 마지막 정화라는 자리가 옳다. 그리고 그 포지션은 막다른 골목이다.

거기서 끝나는 위치이고, 20세기 이후 한국사의 근대화에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 그렇다면 다산은 왜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인가?

답: 그가 현실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당시 조선사회의 어려움을 타개할 방법으로 내놓은 사회경제적 개혁론이 20세기 이후 동아시아 막시즘에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분명 양자간에는 공통적인 부분이 있지만, 다산은 그런 동기에서 그 주장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여전제라는 것은 유교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전통을 받아 중국이 대약진운동-인민공사를 만들었건, 북한이 집단농장을 만들었건 그런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국이 인민공사, 북한이 집단농장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와 유사한 주장을 내건 다산에게 근대화의 단초를 열었다는 타이틀을 제 멋대로 붙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조선후기, 다산의 여전론을 포함해서 정전론, 한전론 등 다양한 토지개혁론이 나왔는데 이는 모두 근대화-봉건질서의 타파와는 무관한 정책론들이다.

모두 원시 유학에서 해결책으 찾고자 한 것으로 동아시아 근대화와는 무관하다.

이 부분에 대해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딱 하나만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여전론, 정전론, 한전론에 기반을 두고 근대화에 성공한 동아시아 국가가 있는가?

하다 못해 중국도 지금 그렇게는 하고 있지 않다.

다산은 근대화의 선구를 이룬 인물이 아니다.

그의 주장 어느구석에도 근대적인 단초는 없다.

문: 그렇다면 우리는 다산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답: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폄하할것도 과장할 것도 없다. 그는 고려건국이래 천년을 내려온 사대부 사회의 마지막 정화와 같은 사람이다. 그런 명예를 주면 된다.

와불 배꼽에서 목민심서가 나왔다던가,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항상 애장했다던가 하는 루머 아닌 루머는 다산을 한 번만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주장이다.

다산이 희구한 것은 성리학-사대부 사회의 온전한 구현이었지 근대적 사회를 꿈꾼 것이 아니었다.

필자의 말이 틀릴 수도 있겠다. 다만 이 글 마지막에 쓰고 싶은 것은, 다산에 찬양일변도의 현재 학풍은 분명히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점으로 돌아가, 한국 유교사회의 마지막 정화였던 그에게 맞는 옷과 자리를 마련해 입혀 드리는 것이 옳다고 본다.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루머도 사실 다산의 주장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매우 낮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오해였다. 다산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이지만 다른 동아시아 유교국가의 지식인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19세기의 조선에서만 통하는 수준이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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