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루고자 하는 이 무덤은 아래를 일단 참조하라
https://www.city.asago.hyogo.jp/site/kyoiku/1163.html
나아가 근자 그 발굴성과에 대해서는 아래가 참고가 된다.
兵庫県和田山町筒江 現地説明会資料 2002年8月4日
兵庫県教育委員会 埋蔵文化財調査事務所
https://www.gensetsu.com/020804chasuriyama/doc1.htm
병기 창고 고을 병고현兵庫県 아침이 오는 도시 조래시朝来市 화전산정和田山町 동강筒江 793-1에 소재하는 다스리고분茶すり山古墳[차스리야마고훈, ちゃすりやまこふん]은 화전산和田山이 동쪽으로 뻗어내린 보주 고개[宝珠峠] 도중, 표고 약 144m 구릉 끝머리에 위치하는 5세기 초반 무렵 고대 일본 산무덤[山古墳]으로 공중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원형인 원분円墳이다.
지름 약 90m, 높이 약 18m이며 2단으로 지어 쌓아올렸다고 생각된다.
이런 둥근 무덤으로서는 지름 109m인 나라현奈良県 부웅환산고분富雄丸山古墳이나 105m인 기옥현埼玉県 환묘산고분丸墓山古墳에 버금한다.
그 정상에는 동서 약 36m, 남북 약 30m인 타원형 평탄면이 있고 그 안쪽에서는 원통식륜円筒埴輪이나 나팔꽃 모양 조안형식륜朝顔形埴輪을 돌렸으며 각 단 평탄면에서도 하니와를 줄 지어 배치했다.
규모만큼 껴묻거리 역시 풍부한 편이라 하지만, 미안하나 동시대 신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기원전 1세기에 만든 경산 양지리 목관묘에도 훨씬 못 미친다.
경사면에는 즙석葺石을 했지만 많이 유실됐다.
특이하게도 정상에서 2개 매장시설이 확인됐으니 상대적으로 큰 쪽을 제1주체부主体部로 설정하고 그 곁에 상대적으로 작은 제2주체부主体部가 나란한 방향으로 배치됐다.
제1실은 동서 길이 약 13.6m, 남북 너비 10. 1m인 장방형 묘광墓壙을 2단으로 파고는 그 안에다가 길이 약 8.5m, 너비 약 1m인 상자형 목관[箱形木棺]을 안치했다.
그 안에서 크고작은 가형식륜家形埴輪 등이 출토한다. 목관 안에서는 돟경銅鏡 3점을 비롯해 각주甲冑, 다량의 도검류와 철촉, 방패, 구슬류, 철제 공구류 등이 나왔다.
목관은 바닥판이 없고 그 안쪽에서는 적색 안료(아마도 수은)을 깔았다.
관 내부는 격벽판에 의해 3개 구역을 나뉘는데 중앙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 주실主室은 길이 2.2m에 바닥에는 강돌을 깔았다. 머리는 동쪽으로 뒀고 그 동쪽에 동경 3점을 안치했다. 머리 양쪽 동경 2점(1·2号鏡)은 문양이 있는 뒷면을 위로 향하게 해서 뉜 상태인 반면 나머지 3号鏡은 시신 머리 기준 오른쪽 위에 경면鏡面을 안쪽으로 향하고 하고 관에대가 붙여 세운 상태였다.
1·2호경과 시신 머리쪽을 도검刀剣으로 「コ」 자 모양으로 둘러싼 모습이다. 머리 왼쪽에 수즐竪櫛이 2점 있다. 이곳 역시 머리쪽에 수은을 잔뜩 부었다.
시신 허리춤 양쪽에는 도검 여러 자루를 나란히 놓았으니 날끝이 다리를 향한다. 이들 도검에는 칠막漆膜이 남았다.
중앙에는 직호문直弧文을 넣은 것이 있다. 주실 내 도검류는 약 19점.
1호경은 머리 기준 왼쪽 위쪽에 있으며 지름 16.2cm인 방제경 변형반룡경変形盤龍鏡이다. 거을 주변에는 벽옥碧玉제 환옥勾玉 1점을 비롯해 벽옥제碧玉製 등의 관옥 약 10점이 흩어진 상태였다.
2호경은 1호경 우측에 위치하는 방제경 대치식이수사수경対置式二神四獣鏡으로 지름 15.7cm다. 2호경 곁에도 관옥이 여러 점 발견되며 1·2호경 사이에는 유리제 소옥小玉이 많이 집중된 모습이다.
3호경은 지름 16.5cm인 내행화문경内行花文鏡으로 그 세부 특징을 볼 적에 위진魏晋에서 수입한 중국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1실에서는 도검류刀剣類나 철촉鉄鏃이 비상하게 많이 출토하고 방패나 갑주甲冑類도 확인되는 점에서 묻힌 사람은 군인(장군이었겠지?)이었다고 생각된다.
제2실은 제1실과 병행한 모습으로 그 북쪽에서 드러났다.
약 7.5 × 3.7m 묘광 중앙에 길이 약 4m인 상자형목관을 배치했다. 제1실과 마찬가지로 약 2.5m인 주실 양쪽에 부실副室을 마련했다.
동부실東副室에서는 철부鉄斧 조선鋤先 겸鎌 도자刀子 등 철제농기구류鉄製農工具類 53점 이상이 집중하고 서부실西副室에서는 철촉鉄鏃 14본이 다발로 발견됐다.
그 주실 바닥은 1호실과 마찬가지로 5cm 정도 되는 둥근 돌을 2.2m 길이로 깔았다.
동단東端에서 석침石枕이 나왔고 빗도 출토했다. 머리 쪽에서 환옥勾玉・관옥管玉이 나왔고 가슴 쪽에서는 동경銅鏡 1면이 있고 그 위 혹은 주변으로 유리제 소옥이 400점 이상 산포하며 시신 허리춤 양쪽에서는 대도大刀 각 1점을 부장했다.
거울은 지름 14.8cm인 방제彷製 「이선사수경二仙四獣鏡이며 문양이 있는 뒷면을 위로 한 채 두었다. 유리제 小玉은 지름 2~3mm로 거울 위에서 연접한 상태로 발견됐다.
勾玉은 2점, 管玉은 12点이 확인됐다. 碧玉製管玉이 2점이고 기타는 담록색淡緑色 연질석재제軟質石材製다.
빗은 길이 약 7cm인 複合櫛로서 장송용으로 생각된다.
대도는 남쪽의 것이 길이 101cm, 북쪽 것이 81cm다.
묘광 동쪽 양쪽 귀퉁이에 큰 돌을 두었는데 묘석標石이 아닐까 한다.
여러 모로 보아 제2실은 남성이 묻힌 것이 아닌가 하며, 그 시종 혹은 종자에 해당하는 이가 묻힌 데가 아닐까 한다.
***
빈깡통일수록 소리가 요란한 법이다.
왜 고대 일본이 이른바 고분시대에 저리 무덤을 크게 만들었을까?
그 무덤 양태를 보면 4~5세기 무렵 무덤들이 덩치가 열라 큼을 본다.
한데 그 양태를 보면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이 팔뚝 힘 자랑하는 꼴과 아주 같아서, 간단히 말해 빈깡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양태를 보면 딱 빈껍데기 그것이라, 그 빈껍데기를 요란하게 보이게 하고자 두 가지 방식을 구사하는데
첫째 덩치라 이는 무덤을 엄청나게 크게 만드는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둘째 그것을 장식하는 기법으로 하니와라 해서 빈깡통을 있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무식한 방법, 곧 내가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빈껍데기 빈그릇을 잔뜩 세워서 위엄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게 된다.
저런 무덤들은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노동력을 징발했음이 분명하지만, 그 양태와는 달리 속내를 보면 실상 볼 것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이는 동시대 신라무덤과 비교하면 너무나 현격한 문화 수준 차이를 빚는다. 덩치에서는 황남대총 천마총이 훨씬 뒤지는 듯하지만 그 속내는 보면 문화로 꽉 차 있다.
바로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다.
일본에서 진짜로 문화가 채워지는 시대는 놀랍게도 6세기 이후 저 무덤들이 현격이 덩치가 작아지면서다. 그때서야 비로소 저들은 한반도와 비교하면 문화가 채워지는 모습을 본다.
본문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5세기에 만들었다는 저 다스리고분은 덩치가 컸지, 그보다 600년 전 한반도에 등장한 경산 양지리 목관묘의 그것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
문화란 그렇게도 무서운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일본사에서 고분시대는 빈깡통인 시대다.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륜埴輪, 그 끝을 향해 달리는 메스리야마고분メスリ山古墳(1) (1) | 2024.03.20 |
---|---|
2024 허준박물관 박물관대학 (1) | 2024.03.20 |
허리춤 양쪽, 그리고 머리통에 쓰쿠리다시를 만든 또 다른 아쿠아맨의 주검 집 오색총고분五色塚古墳 (2) | 2024.03.19 |
아쿠아맨이 잠든 정법사고분正法寺古墳 (2) | 2024.03.19 |
다이센료고분大仙陵古墳 탐구(2) 힘 자랑 무식했던 시대 (2)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