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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당쟁을 격화한 석담일기石潭日記, 류성룡을 씹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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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6일 동해 상에서 실시된 한미 연합 해군훈련에 참가한 한미 군함들. 한데 한국군 군함 이름이 서애류성룡함, 강감찬함, 율곡이이함이다. 잉? 율곡함과 서애함이 한 군데서? 화합이 되겠는가?

 
붕당을 증오했지만, 결국 그 자신도 동서 분당 와중에 어느 한쪽에 몸담을 수밖에 없던 율곡은 그 처지가 여로 모로 사르트르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사르트르더러, 네 철학은 실존주의다고 하니, 사르트르는 처음엔 아니다고 길길이 날뛰었다가 나중엔 그래 난 실존주의자다고 선언하고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를 설파하기에 이른다. 

일명 경연일기經筵日記라고도 일컫는 그의 석담일기石潭日記가 공개가 언제 되었는지가 나로서는 관심이지만 이 대목은 아직 추적하지 못했다.

조선시대 글쓰기 양태를 보면, 이미 초고 단계에서 이미 주변에 다 알려지기 마련인데, 그 공간이 언제이건 상관없이 그가 쓴 글은 생전에 이미 공개되어 알려졌을 것이며, 더불어 그의 사후 직후에는 이미 석담일기는 그것이 공간되었건 아니건 육필원고는 이미 조정에 들어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며, 나아가 실록 찬수 단계에서는 조정에 압수되었을 가능성 100%다. 

한데 이 석담일기는 붕당을 더욱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된다.

석담일기에서 율곡은 그 이전 논법과는 사뭇 다른 필법을 구사하니, 인물과 사안에 대한 가차없는 비평이 그것이다. 이 가차없는 비평은 당쟁을 격렬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그의 붓끝에선 퇴계도, 남명도 온전치가 못해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하물며 미암 유희준이며 고봉 기대승은 아주 등신으로 만들어버린다. 

류성룡은 내 기억에 이이보다는 6살 정도가 어리며, 그에 따라 소년 천재 이이보다 출사가 늦었다. 퇴계 학도인 류성룡이 이 석담일기에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평이 아래와 같다.
 
"유성룡柳成龍을 상주尙州 목사로 삼았다. 유성룡이 모친이 늙어서 가까운 읍을 얻어 봉양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네가 나가면 내가 한 신하를 잃는다. 다만 모자의 정이 간절하니 듣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상주 목사를 시키니 선비들이 모두 그가 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유성룡은 재주와 식견이 있고 경연에서 계사啓辭하면 잘 설명하여 아룄으니, 사람들이 모두 찬미하였다. 다만 일심으로 봉공하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를 돌아보는 뜻이 있으니, 군자는 부족하게 여겼다.

정구鄭逑를 창녕 현감昌寧縣監으로 삼았다. 정구는 예학禮學에 힘써 몸단속을 몹시 엄하게 하며 의논이 영발英發하고 청명淸名이 날로 드러났다. 여러 번 벼슬을 시켰으나 나오지 않더니, 이번에 상경하여 배명拜命하였다. 임금이 인견하고 배운 것을 물어보는 말씀이 온순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정구가 부임하였다."


뭐 이걸 보고 류성룡 기분이 어땠을까? 이빨을 갈았을 것이다. 이후 실제 류성룡의 행적을 보면 이이를 향한 이빨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일심으로 봉공하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를 돌아보는 뜻이 있으니, 군자는 부족하게 여겼다."

이 대목을 보곤 서애는 이런 우라질 놈이라고 울분을 씹었을 것이다.

류성룡이 대표하는 동인과의 관계는 율곡이 그나마 일찍 죽었기망정이지, 오래살았더래면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석담일기는 조선후기 내내 핵폭탄이었다. 

덧붙여 동시대인을 향한 석담일기 필체 하나를 보면 

"강원도 관찰사 정철鄭澈이 상소하여 도道의 병폐를 아뢰니, 임금이 칭찬하여 답하고, 해당 관청에 내려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했다. 정철이 백성들의 고통을 성의껏 빠짐없이 찾아내었고, 또 교화를 숭상하여 착한 것을 포상하고 악한 것을 징계하니, 동쪽 백성들이 용동聳動하였다."

송강은 이리 후한 점수를 줬다. 왜? 친구인 데다 같은 당파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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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니 석담일기 간행에 대해서는 아래 전문 논고가 있지만 이 글 전문을 내가 살피지 못했다.
 
유성선, 「石潭野史⋅日記」에서 「經筵日記」까지 刊行過程의 思想的 推移 硏究, 漢文古典硏究2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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