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역사적 실상에 부합하는지는 차치하기로 한다.
고고학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해서 작성한 대가야 영역이라 해서 대가야 전문박물관을 표방하는 고령 대가야박물관에서 내건 지도다.
이것이 시간이 누층한 결과인지, 다시 말해 시기를 달리하는 대가야 흔적인지, 아니면 특정 시기 대가야 흔적인지는 내가 모르겠다.
나아가 저들 지역에 대가야 영향이 농후한 고고학적 성과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정치역학의 관점에서 직접 지배 흔적을 말하는지, 혹은 문화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저 강역의 사실성 여부와는 별도로 대가야라는 왕조가 한때 이 한반도에 존재했고, 그 존속기간은 물경 500년에 달하지만, 그들의 활동상을 전하는 기록이 전무에 가깝다는 섬뜩함이다.
대가야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승람》 등지에 몇 줄 흔적이 남았을 뿐이고, 그 논란 많은 《일본서기》에 계체기를 중심으로 종잡기 힘들만치 제삼자의 눈에 왜곡 투영한 형태로 더러 남았을 뿐이다.
다만, 이 간헐적인 흔적을 통해서도 우리는 대가야가 기원직후 지금의 김해 일대 금관가야와 거의 동시기에 건국했으며, 특히 4~6세기에는 당당한 한반도 고대사 주역 중 하나로 군림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저 만만찮은 위력을 자랑한 오백년 왕조도 철저히 매몰되고 말았다.
《화랑세기》 원본엔 적지 않은 대가야 관련 기록이 있었지만, 현존본이 누더기를 방불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는 바람에 아쉽기 짝이 없다.
김흠운은 《삼국사기》 권 제47 열전 7에 의하면, 어린 시절 화랑 문노의 문하에서 노닐었다는데, 그런 그 문노가 《화랑세기》를 통해 비로소 대가야 혈통임이 밝혀졌다.
금관가야가 김유신을 남겨주었다면 대가야는 문노를 물려준 것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문노의 아들이 금강이라, 이 금강은 그 뿌리를 전연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상대등이었다고 《삼국사기》에 고개를 들이민다. 그는 김유신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김무력과 활동연대를 대략 같이한다.
하지만 문노에 대해선 김흠운 열전에 김흠운을 위해 찬조출연 딱 한번 하고는, 그 나머지 종적을 알 길이 없다가 《화랑세기》를 통해 비로소 그 베일을 벗었다.
어찌 기록할 것이며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기자들의 숙제다.
예서 기자란 기록자 전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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