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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제도로서의 문화재는 1915년 부여 능산리고분군에서 도쿄제국대학 조교수 구로이타 가쓰미가 시작했다

능산리 전상총塼床塚 실측도


능산리 고분을 이야기할 때, 1915년 7월, 구로이타 카쓰미黑板勝美(1874~1946) 조사 자료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그의 조사성과는 이듬해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제출한 복명서復命書에 보인다.

이 복명서는 1974년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비로소 공개되었다.

이 복명서 존재를 국내 연구자는 대체로 안다.

산직리山直里 서하총西下塚 실측도


한데 이 복명서를 언급하면서 구로이타 자신이 작성한 각종 실측도면은 거의 인용되지 않는 점이 기이할 뿐이다.

이번에 졸저를 내면서 그의 실측도면은 내가 모조리 실었다.

이 실측도면 중 이 능산리 고분군에 이르는 백제시대 참도參道가 있다는 언급이 보이는데, 그의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몰라도 불행 중 다행으로 그가 그린 참도 부분은 파괴되지 않았으니 그 확인을 위한 트렌치 조사는 있었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이 쿠로이타 자료는 문헌사학도인 구로이타가 본격적으로 고고학 겸업을 선언하고 실제 발굴조사를 벌인 사실상의 첫 현장이라는 점에서도 주의해야 한다.

이때 구로이타는 비로소 조선에 상륙했다. 

이후 조선은 쿠로이타 독무대가 된다.

산직리山直里 서하총西下塚 실측도


그는 그 이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전연 엄두도 내지 못한 위대한 사업을 시도하니
제도로서의 문화재 확립이 그것이다.

구로이타가 조선에 발을 디딤으로써 조선에서는 문화재 보호를 위한 각종 법률이 비로소 제정되기 시작하고, 관련 기구가 비로소 출범했다.


그는 조선 문화재학의 아버지다.
싫건 좋건 그는 비조鼻祖다.
그 힘은 어디에 있는가?

그 직전 그의 유럽 자비 유학이 핵심이다.
그는 이집트를 봤다.

이집트학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봤다.
직후 그는 애급 발굴 고고통신을 발신하기 시작한다.

시리즈였다.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그에 맞추어 고고학도들에게 호소한다.
이것이 대략 1909-10년 무렵이다.

조선은 그의 신념을 관철하는 신천지였다.

더불어 이번 복명서 검토 과정을 통해 구로이타가 능산리에서 지금의 중앙고분군 2기만이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백제석실분 3기를 더 팠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이 조사는 지금까지는 세키노 조사로 알려졌다. 그가 보고했기 때문이다.

한데 놀랍게도 이 3기는 쿠로이타가 세키노와 합동조사를 벌인 것이다. 


이 능산리 조사가 구로이타로서는 조선반도 첫 상륙이었다. 그의 상륙으로 식민지 조선에서는 비로소 제도로서의 문화재가 탄생한다. 


따라서 능산리는 단순히 백제시대 고분군 발굴로 그치지 아니한다.

이곳은 제도로서의 문화재가 탄생한 비롯이다.


한국 문화재는 구로이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구로이타 이전 문화재는 도정하지 아니한 나락이다.


세키노에 대한 환상은 버려야 한다.

세키노는 문화재를 몰랐다.


고건축물이 있다.

그래서 조사한다


이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고사사보존령古社寺保存令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