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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대물大物 이야기] 음낭만 비대한 사이고 다카모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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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1828~1877)보다 더한 굴곡 많은 삶을 산 사람 있을까?

일본 열도 규슈지방 땅끝마을 사쓰마薩摩 지방 번사藩士, 곧 사무라이 칼잽이인 그는 메이지유신이라 하지만 꿔다논 보릿자루 천황한테 권력을 돌려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또 다른 막부 군사 쿠데타로 에도 막부 정권을 타도한 주역이었지만, 신정부에서 노선 갈등으로 권력투쟁에 패해 고향 가고시마鹿児島로 낙향한다. 

그가 걸은 길을 보면 앞선 대물 열전 또 다른 주인공 여불위의 그것과 흡사한데, 낙향하고 난 다음 행보 역시 딱 여불위 그것이다. 

전반으로 보아 사이고는 책략가라기보다는 우직한 군인이라는 인상을 나는 짙게 받는다. 그는 나라를 경영할 만한 인재는 아니었던 듯하고 돌격앞으로 딱 이에 어울리는 사람 아닌가 한다. 

그런 까닭에 권력에는 비교적 초연한 모습을 보이거니와, 문제는 낙향한 고향에서의 행적. 무료하다 생각했을까? 봉국 하남河南으로 쫓겨난 여불위가 몰려드는 문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며 떠들썩한 삶을 살았듯이 그를 따르는 군바리들이 문제였다. 
 

비대한 사이고 다카모리

 
고향에다 사설 학교를 열었는데 전국 각지에서 불만이 쌓인 사무라이가 이곳으로 몰려들어 1877년에는 그 학생만도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를 메이지 정부가 얼마나 큰 위협으로 느끼겠는가?

이 양상 또한 넘쳐나는 여불위 문객들이 반란 세력이 될까 우려해 시황제가 여불위를 급박해 자진케 했다는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메이지 신정부 출범은 번사들 몫이었지만, 그렇게 들어선 신정부는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서는 군웅할거하는 독립국가 상태인 번藩들을 가만둘 수 없었다. 번을 폐지하고 나날이 중앙권력이 그 특권을 박탈해가니, 이런 변화에 불안을 느낀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이들이 사이고라는 우산 아래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곳곳에서 반란 기운이 싹트고 그런 기운이 사쓰마에도 뼏쳐 1877년 1월 29일, 그를 따르는 한 무리가 가고시마 군수 공장과 해군 기지를 공격함으로써 훗날 서남전쟁, 西南戦争, 세이난전쟁이라 일컫는 내전의 도화선이 된다. 
 

서남전쟁

 
도쿄로 직격하려 했지만 자신이 세운 메이지정부 정부군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한 사이고는 패색이 짙어지자 가고시마로 퇴각해 진지를 구축하고는 정부군에 대항했지만 역부족이라, 그해 9월 24일 자결하고 마니 향년 50세였다. 부하가 목을 베였다고도 하는 전설이 있는 모양이다. 

암튼 전쟁통에 총을 맞아 그의 시신이 범벅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부군은 그 시체 더미에서 사이고를 찾았으니, 무엇으로써 그를 감식했을까? 당시는 DNA 검사를 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불알이었다. 아랫도리를 다 까서 아 이 사람이 사이고임을 확인한 것이다. 

도대체 그의 불알을 어땠기에?

사이고는 당시로서는 거인이었다. 키가 180cm였다 하며 몸무게 또한 90kg이었다는데, 그는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지만 초상은 있다. 
 

 
에도아르도 키오소네 Edoardo Chiossone (1833~1898) 라 해서 이태리 출신으로 도쿄에서 사망한 화가가 그린 것이라는데 이걸 보면 마동석이다. 저런 사람이 쿠데타를 주도했다는데 무섭기는 했겠다 싶다. 

그는 상피증象皮病이라 해서 규슈 남부지방 사람들이 많이 앓는 풍토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는데, 이 증상은 이 계통 사람들이 전문으로 설명할 듯하고, 아무튼 기생충에 의한 감염이라 하는데 그에 감염하면 피부가 마치 코끼리 그것처럼 까칠까칠하게 된다 해서 이리 부르는 모양이다.

이것이 어떤 영향을 미쳐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사이고는 음낭陰囊이 비대해졌다 한다.

바로 이 거대한 음낭 검사를 통해 그의 시신을 확인했다 한다. 음낭은 간단히 말해 불알이다. 그것을 뿌리로 삼아 쭉 내민 돌출과는 다른 부위다. 

관련 사진 게재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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