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시황제 7년, 기원전 240년, 시황제 아버지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의 생모인 하태후夏太后가 죽었다.
장양왕 아버지인 효문왕孝文王의 왕비 화양태후華陽太后는 남편 효문왕과 함께 수릉壽陵이라 일컬은 무덤에 같이 묻혔다.
시황제를 기준으로 할머니인 하태후랑, 증조모인 화양태후까지 모두 죽은 까닭에 당시 진秦나라 왕실에서 왕실 여성 어른은 시황제 엄마인 조희趙姬, 곧 조태후趙太后밖에 남지 않았다.
조나라 출신으로 그쪽에서는 여불위 첩이었다가 훗날 여불위가 장양왕 자초한테 바친 여성 말이다.
앞서 봤듯이 조태후는 남편이 죽자 홀로 밤을 참지 못하고 걸핏하면 여불위를 잠자리로 불러들였고,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난다 생각하는 여불위는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매달아도 끄떡없다는 대물 거시기의 소유자 노애嫪毐를 고자 내시인 것처럼 속여 궁중에 들여 대타로 삼게 하고는 자신은 그 마수에서 빠져나왔다.
주변 눈을 피하고자 조태후는 자신이 거주하는 궁궐조차 딴 데다 마련하고는 나가 살면서, 이미 노애의 아들 둘까지 몰래 낳은 터였다. 이로 보아 조태후는 남편 장양왕 자초가 죽을 당시 펄펄 끓는 청상과부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시황제가 즉위한지 9년째 되던 기원전 238년, 어떤 이가 노애嫪毐는 실은 내시가 아니며, 늘 조태후와 몰래 간음하면서 자식 두 명을 낳고는 모두 숨겨놓았다고 고발하고 나선 것이다. 뭐 여기까지야 그럴 수 있다 쳐! 시황제를 빡치게 만든 고변은 다음이었다.
노애가 조태후와 음모하기를 “왕이 죽으면 아들을 후사로 삼읍시다”라고 했다 한다.
이건 명백히 반역이다. 이에 시황제(이때는 시황제라 일컫지는 않았지만 편의상 그리 부르기로 한다)는 사법경찰관을 보내 진상을 알아보니 모두가 사실이었다. 더구나 이 일에 상국相國인 여불위가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빡친 시황제는 그해 9월, 노애는 삼족을 주살하는 한편, 자기 엄마 조태후가 낳은 노애의 두 아들을 죽여버리고, 엄마조차도 옹雍이라는 땅으로 옮겨 살게 했다. 실상 유폐인 셈이다.
노애를 모시는 사람들은 모조리 그 재산을 몰수하고는 지금의 사천 지방 촉蜀으로 추방해 버렸다.
왕이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한 노애는 그 공식 발표가 나기 전, 왕이 옹 땅에서 제사를 지내는 기회를 빌려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고는 조태후 인장을 위조해 군사를 일으켜 기년궁蘄年宮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무참히 실패하고, 호치好畤라는 데로 도망간 노애는 거기서 붙잡혀 목 베임을 당하고는 일족까지 함께 망하고 말았다.
여불위도 이 일 때문에 파면되었다.
문제는 여불위. 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여불위를 죽이려 했지마는 선왕을 받든 공이 컸던 데다 조정에 온통 그의 사람들이라, 그네가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나 그럴 수는 없다 하니, 시황제 역시 어쩔 수 없이 봐주다가 대략 1년 만인 재위 10년, 기원전 237년 10월에 상국에서 여불위를 면직처리하고 문신후 여불위는 봉국인 하남河南으로 떠나게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여불위를 수도 함양에서 쫓아낸 까닭은 엄마가 다시 여불위랑 붙어 놀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 무렵 제齊나라 출신 모초茅焦라는 이가 목숨을 무릅쓰고는 엄마를 유폐할 수는 없다 한 데 대한 조치였다. 주변 눈치도 있고 하니 할 수 없이 엄마를 함양으로 모셔오기는 했지만, 과거의 연인 여불위랑 같은 함양 땅에 둘 수는 없었다.
그렇담 쫓겨난 여불위는 어찌 되었을까? 조용히 여생이나 즐기며 보냈음 좋았겠지만,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 그 자신도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쫓겨난 1년간 문전이 북새통을 이루자 이것이 시황제를 자극한 것이다.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경고장을 보낸다.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기에 그대를 하남 땅에 봉하고 10만 호 식읍을 내린 것인가? 그대는 진나라와 무슨 친족관계가 있기에 중보仲父라고 일컬어진 것인가? 가족과 함께 촉 땅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하라.”
이제 더는 버틸 힘이 없다고 판단한 여불위는 독주를 마시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애를 처단하고 골칫거리 여불위까지 죽어주자 그때서야 비로소 시황제는 앞서 촉 땅으로 추방한 노애의 사람들을 함양으로 돌아오게 한다.
그렇다면 여불위의 애첩이었다가 나중에는 자초의 품에 안겼다가, 다시 노애라는 대물왕한테 빠져 화려한 날을 보낸 조태후는 어찌 되었을까?
시황제 19년, 기원전 228년,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은 제태후帝太后라는 시호를 올리고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장양왕과 함께 채양茝陽이라는 곳에 합장한다.
물론 사기를 비롯한 후세 사가들은 시황제가 장양왕 아들이 아닌 여불위 아들이라 했지만, 솔까 유전자 검사도 안 해 봤는데 어찌 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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