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이니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 같은 도서목록집(이들은 모두 남송시대 유산이다)이 그 시대 출판 문화의 총화라는 인식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통용한 모든 책을 저들 목록집이 커버한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특히 시대를 거슬러 저들의 남상인 《한서 예문지漢書藝文志》가 누린 위상은 가히 절대였다. 이 《예문지》는 전한前漢 말 유향劉向이 정리한 당시 도서목록 해제집을 그대로 축약한 것이니, 그에서 보이는 도서들은 적어도 전한시대 말기에 통용한 모든 도서를 커버한다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예문지》 신화는 여지없이 깨졌다. 지하에서 무수한 간독簡牘과 백서帛書가 출현하면서 여지없이 그 신화가 무너졌다. 나름 빠짐없이 정리했다고 생각한 저들 목록집에도 구멍이 너무나 많아 누락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 예문지가 마왕퇴馬王堆 한간漢簡에서 철퇴를 맞더니 곽점초간郭店楚簡에서 회복 불능 식물인간으로 몰렸다.
《한서 예문지》가 커버하지 못하는 도서는 많았다. 누락 또한 적지 아니해서 그에서 보이지 않는 도서가 넘쳐났다.
덧붙여 지하에서 출현한 죽백竹帛은 종래 후대가 만들어낸 가짜책이라 해서 딱지가 붙은 책들도 혐의를 벗겨냈으니, 저 《갈관자鶡冠子》니 《문자文子》 또한 현존본은 후대 위서僞書라 했다가 죽백이 출현하면서 여지없이 깨졌다.
고힐강顧頡剛이 주도한 회의주의가 이른바 실증학의 선구를 열었고, 그것이 일정한 역할을 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나 지하의 죽백은 고힐강을 매장했다. 그것이 지나쳐 요즘의 이학근李學勤 행태는 역으로 흐른다.
《손자孫子(손빈병법孫臏兵法)》도 가짜라 했다가 깨졌다. (2017.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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