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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어느 연합군 포로감시원의 회고와 울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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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공장 DB를 돌리다가 아래 1998년 8월 12일자 내 기사가 걸린다. 이 무렵이면 내가 사회부에서 일할 때라, 그땐 이른바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관심이 지대할 무렵이라, 그때 내가 개인적으로 자주 들락거린 데 중 한 곳이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라는 데라 


이곳은 주로 원폭피해자 문제를 다루는 곳이었다. 얼마전 우리 공장 앞 옛 일본대사관 터 앞에서 매주 개최하는 이른바 수요집회를 보니, 이곳 회원분들이 있어 빙그레 웃었으니, 다만, 당시 내가 자주 만나던 분들은 모습이 뵈지 않는 듯해 한편으로는 좀 씁쓸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DB에서 추려낸 이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과 설명이 있다. 동원된 것도 억울한데…전범 멍에까지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동원한 포로 감시원. 왼쪽 첫 번째 인물이 포로 감시원으로 태국에 보내졌다가 나중에 BC급 전범으로 기소된 이학래(89) 씨. 동진회와 동진회를 응원하는 모임이 26일 도쿄도(東京都) 나카노(中野)구 '나카노제로'에서 개최한 전시회에 게시된 패널 사진을 재촬영한 것임. 2014.4.27 <<국제뉴스부 기사 참고>> sewonlee@yna.co.kr (끝)



보다시피 아래 기사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통의동 사무실(이후 경희대쪽인가 어딘가로 옮겨갔다고 기억한다)에서 2차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일한 어떤 분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한데 내가 쓴 기사지만, 20여년이 흐른 지금, 이 인터뷰 기억이 도통 없다. 바카야로가 되어서이겠지 해둔다. 


이 조선인 포로감시원 문제는 예민한 구석이 좀 있다. 그들을 논할 적에 우리는 흔히 이런 생활을 직접 한 사람들 증언을 통해 이들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 반대편에서도 바라봐야 한다. 다시 말해, 이들 포로감시원들의 감시의 대상이 된 연합군 포로 시각에서도 이 사태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쪽을 짚어야만 왜 우리의 지금 상식과는 정반대로 저들이 저리도 혹독하게 전범으로 재판받고, 개중 일부는 사형까지 당해야 했는지를 어느 정도 짐작한다. 


하지만 이쪽은 일부러 침묵해야 하는 어떤 불가피성도 없지는 않다. 그 불가피성을 이곳에서 애써 시시콜콜히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자체가 비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기사 말미에는 '(사진있음)'이라 했지만, 막상 우리 공장 DB를 검색하니 이 분 사진이 걸리지 않는다. 아마 망실했거나, 혹은 어딘가에는 있는데 내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군복입은 김석기옹 (창원=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일제에 징용돼 포로수용소 감시원 등으로 일하다 전후 비·시(B·C)급 전범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은 국내 유일 생존자 김석기옹이 일본 군복을 입고 찍었던 한장 남은 사진. 한달간 배를 타고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떠나기 전 찍은 사진으로 당시 김옹의 나이는 19세였다.<<지방기사참조>> choi21@yna.co.kr (끝)



1999.08.12 19:36:00

<8.15 특별기획> 포로감시원 출신 박병찬씨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일제때 인도네시아로 끌려가 연합군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박병찬( 朴炳瓚. 77. 경기 이천군 대월면) 씨가 거둥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12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를 찾은 것은 일제를 위해 강제로 일하고도 받지못한 미불임금이 얼마가 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필요한 서류를 낸 박씨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미불임금이 확인이 되지 않으면 유족회를 통해 받지못한 월급이 얼마인지 일본정부에 확인요청을 할 참이다.


물론 박씨가 미불임금을 확인한다 해서 일본정부가 이를 돌려줄 리는 만무하다. 일본정부는 반세기 전 미불임금을 돌려달라는 한국 태평양전쟁피해자들에게 늘 되풀이하는 것처럼 모든 보상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끝났다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지난 91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해 8년째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는 그는 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난 기자에게 3시간가량 일제 식민통치로 자신이 겪어야 했던 애환과 울분을 털어놓았다.


"이젠 늙어서 옛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면서도 그는 60년 남짓 지난 과거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日군속에서 항일운동가로…안승갑 선생 유고집 발간 (서울=연합뉴스) 1940년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일본군 소속 포로감시원으로 일하던 조선인들. 우측 하단이 안승갑 선생. 2013.12.29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tsl@yna.co.kr (끝)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지목돼 그 유명한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료들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기무라 세이코' 박성근, '가시무라' 변종윤, '오야가다키마사' 최창선. 나처럼 연합군포로감시원이었는데 모두 7명이 사형됐어요. 이들이 사형장으로 갈 때 내가 일일이 악수를 나눴는데 지금도 마지막 모습이 선해요".


일제때 연합군포로감시원으로 끌려간 조선청년들은 징용노무자나 학도지원병, 위안부, 근로정신대 등 다른 태평양전쟁 피해자들과는 해방 뒤 독특한 길을 걸었다.


일본과 싸웠던 미국과 영국,네덜란드,호주 등 연합군 '코쟁이' 포로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이들 조선청년들 중에는 박씨가 기억하는 최창선씨 등을 비롯해 일부가 전범으로 지목돼 처형당하거나 형을 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연합군포로감시를 했던 박씨 또한 징역 5년이 구형됐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미결수로 복역하다 징집된 지 꼭 10년 만인 1950년 3월에야 일본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꽃다운 청춘을 전부 인도네시아 밀림에다 버린 것이다. 충북 충주에서 2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그가 난데없이 일본군속으로 강제징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9년전인 1940년 양력 6월3일.


동진회총회 기념촬영 사진 (창원=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일제에 징용돼 포로수용소 감시원 등으로 일하다 전후 비·시(B·C)급 전범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은 조선인들의 모임인 동진회가 1959년2월22일 일본에서 촬영했던 총회기념사진.두번째줄 맨오른쪽 바바리를 착용한 사람들이 국내 유일의 생존자 김석기옹, 맨 앞줄 왼쪽에서 5번째 앉은 사람이 동진회 회장인 이학래옹이다.<<지방기사참조>> choi21@yna.co.kr (끝)



조선인 면서기가 전달한 징집통지서는 원래 2살 터울인 형 앞으로 날라들었으나 장남인 형을 대신해 자원했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몰랐던 그가 29살 때까지 10년 동안이나 이역만리 인도네시아 밀림에서 떠돌게 될 줄은 모른 채 기차를 타고 군속훈련소인 노구치(野口)부대가 있던 부산 서면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2개월 동안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군속은 말 그대로라면 군대에 속한 민간인이지만 일제때는 군인과 군속은 사실 구분이 없었다.


이 훈련소에는 전국 각지에서 징집된 조선인 3천2백명이 있었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초 훈련이 끝나고 박씨를 포함한 조선청년들은 연합군포로감시원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각지에 배치됐다.


"200명은 인천에 있던 연합군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갔고 나머지 3천명은  3천t급 화물선에 실려 동남아로 갔지요. 나를 포함한 천명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배치됐고 싱가포르와 태국에도 각각 천명씩 갔어요". 



동원된 것도 억울한데…전범 멍에까지 (도쿄=연합뉴스) 일제 강점기에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돼 태국으로 징용됐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BC급 전범으로 기소돼 옥살이를 한 이학래(89) 씨가 26일 도쿄도(東京都) 나카노(中野)구 '나카노제로'에서 열린 사진 전시회에서 한국인 전범 문제에 관해 발언하고 있다. 2014.4.27 <<국제뉴스부 기사 참고, 동진회를 응원하는 모임 제공>> sewonlee@yna.co.kr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당시에는 바다비아로 부르던 자카르타 연합군포로수용소였다. 수용소는 분견소 단위로 시내 여기저기 있었다고 한다. 박씨는 하루  8시간씩 분견소를 옮겨다니며 보초를 섰다.


"대개 분견소장은 일본군 대위가 맡았는데 분견소마다 연합군포로 숫자가  달랐어요. 분견소 말고도 환자수용소가 따로 있었지요. 자바지역 포로수용소 일본대장은 별 2개짜리 육군 중장이었요.지금은 별  2개가 소장이지만 그때는 중장이었어요".


이후 그는 자바 시내를 벗어나 후로레스섬이니 하는 곳으로 파견나가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연합군포로들을 감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행장을 만들어 놓으면 뭐해요. 완성되자 마자 연합군 비행기가 날라와 폭탄으로 다 파괴해버리는데요".


그는 포로감시원 생활 중 조선인에 얽힌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나같은 조선인 포로감시원 3명이 하루는 일본군인의 기관총을 빼앗아 차를 몰고 다니면서 일본인이라면 닥치는 대로 난사했어요. 이들 중 한 명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자살했으며 나머지 두명은 한 부대에 침입해 대위를 포함한 일본군인 몇명을 죽이고 술을 진탕 마신 뒤 둘 다 자살했지요".


이런 생활을 보낸 그는 해방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으나 연합군포로감시원이라는 전력 때문에 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고 갖은 곡절 끝에 고향을 떠난 지 10년만에야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 3월 그리던 집에 돌아온 그를 기다린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사진있음)

taeshik@yonhapnews.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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