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순수비 중에서도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자리한 소위 북한산 순수비가 존재를 드러내기는 오래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위치한 곳이 북한산 봉우리 중 하나요, 그곳이 사방을 조망하는 위치 때문에 언제나 외부에 노출되었거니와, 온통 거대한 바위인 이 봉우리 꼭대기에 우뚝하니 선 표지성表識性에서 비롯한다. 이 비석이 차지하는 막강 위치는 북한산을 구성하는 무수한 봉우리 중에서도 오직 이곳만을 비봉碑峰이라 일컫게 하거니와, 비봉이란 빗돌이 선 봉우리라는 뜻인 까닭이다.
북한산 비봉
하지만 이 비석 실체가 진흥왕이 세운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는 익히 알려졌듯이 19세기 들어와 김정희를 기다리고 나서였다. 그가 현지를 답사하고, 남긴 증언을 볼 적에 그때까지만 해도 글씨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으며, 비석은 온통 이끼로 범벅이었다. 김정희가 등장해 이를 진흥왕비로 확정하기 대략 반세기 전, 《택리지》로 유명한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1690~1756) 역시 이 비석의 존재만큼은 알았다. 다만, 청담이 현장을 직접 보지는 않은 듯하니, 이를 두고 맹랑한 말을 하는 까닭이다. 이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동아시아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에서 말미암으니, 현장을 보지 않으니, 전대前代 문헌에 보이는 구절을 끌어와서 짜깁기 우라까이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택리지》 중 팔도론八道論, 개중에서도 경기도京畿道 편에 보이는 다음 관련 구절 역시 그가 참고한 선대先代 문헌 중 마음에 드는 구절을 끌어왔을 뿐이다.
북한산 비봉 진흥왕순수비
옛날 신라의 승려 도선道詵이 《비기秘記》를 남겨 "왕씨王氏를 잇는 자는 이씨李氏이고, 한양에 도읍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려 중엽 윤관尹琯을 시켜 백악산 남쪽에서 지세를 관찰하여 오얏나무를 심고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면 그때마다 베어내어 기운을 억눌렀다. 우리 조선이 나라를 선양禪讓받고 나서 승려 무학에게 도읍지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향하여 비봉碑峰에 이르렀다. 돌로 된 비석 한 개가 있어 보니, 큰 글씨로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이곳에 이르리라)"나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곧 도선이 세운 빗돌이었다. 무학은 마침내 길을 바꿔 만경대의 정남쪽 맥을 따라 곧장 백약 밑에 당도하였다. 세 개의 맥이 합쳐져 하나의 들을 이룬 지세를 보고서 마침내 궁궐터로 정하였으니 다름 아닌 고려 때 오얏나무를 심었던 곳이었다. (번역은 안대회 외 옮김, 《완역정본 택리지》, 휴머니스트, 2018, 153쪽에 의거한다.
맹랑한 소리 일색이다. 이는 《택리지》가 지닌 치명적 함정 중 하나이거니와, 이런 무수한 전설로 점철하는 그의 이 저술은 내 보기엔 탁상의 안출案出이다. 한데 이런저런 자료들을 짜깁기해서 새로운 저술을 창조하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 중 하나가 자기가 본 것만큼은 내가 그런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한다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가보지도 못한 곳들을 전대에 나온 문헌들, 예컨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니 하는 지방지들을 버무려서 만들 수밖에 없거니와, 그런 곳 중에서도 내가 직접 본 곳은 현장성을 가미하여 윤필하기 마련이거니와,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내가 이 블로그에서 '18세기, 한반도는 인구가 폭발했다'는 제하 글에서 다루고 적출하고 적시한 강원도 산림 황폐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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