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77)
서림의 벽에 쓰다[題西林壁]
송(宋) 소식(蘇軾) / 김영문 選譯評
가로 보면 고개 되나
옆으로 보면 봉우리
원근 고저가
각각 다른 모습이네
여산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까닭은
이 몸이 이 산에
머물기 때문이네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앞에서 읽은 이백의 「여산폭포를 바라보며(望廬山瀑布)」와 곧잘 비교되는 시다. 소식은 시(詩)·사(詞)·서(書)·화(畵)·악(樂)에 모두 뛰어났으며, 유(儒)·불(佛)·도(道)에 능통했다. 도달한 경지가 하도 광대하고 호방하여 이백도 소식을 스승님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이 시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산의 아름다움을 꾸밈없이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휘날리는 물살이 삼천 척 내리 꽂힌다”는 이백의 시와 막상막하의 경지다. 하지만 궁극적 지향은 완전히 다르다. 당시는 운치와 기상을 중시하므로 이백은 눈에 보이는 여산의 아름다움을 천의무봉의 필치로 묘사했다. 그 뿐이다. 반면 송시는 이치와 함의를 추구하므로 우리는 이 시 형상 뒤에 숨은 의미를 음미해봐야 한다. 각도나 원근 고저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는 사상체계는 무엇인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도가(道家)의 상대주의다. “현실 속 진리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지연신재차산중(只緣身在此山中)”은 매우 낯 익은 구절이다. 당나라 가도(賈島)의 시에 “이 산 속에 계실 터이나(只在此山中)”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것을 비틀었다. 가도의 시에서는 구름 깊은 곳에 있는 은자의 거처를 알 수 없다고 하여 속세 너머의 어떤 경지를 암시했다. 그러나 소식은 자신이 산속에 있기 때문에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말하자면 구름 속에 있는 은자도 그 어떤 경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도사나 선사도 청맹과니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 해답은 「적벽부(赤壁賦)」에 있다. 소식은 '저절로 그러한 세계(自然)'에 녹아들어 그 가없는 흐름에 몸을 내맡곁다.
'漢詩 & 漢文&漢文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사람 보지 못하고 뒷사람도 볼 수 없네 (3) | 2018.06.17 |
---|---|
강물은 북쪽으로 흐르는데 나는 남쪽으로 유배길 (0) | 2018.06.17 |
절치부심하며 권토중래를 꿈꾸노라 (1) | 2018.06.16 |
노니는 물고기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1) | 2018.06.16 |
서역에선 누가 대작해 주겠나? (1) | 2018.06.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