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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두개골로 재림한 사비도읍기 백제지배층

by taeshik.kim 2021.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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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배포한 이 소식은 무엇보다 아래 우리 공장 박상현 기자 보도를 참조키로 하거니와 

 

도굴 안된 부여 백제고분서 두개골 2구·금동귀걸이 발견
박상현  / 2021-07-02 09:31:55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응평리 돌방무덤 발굴조사

 

 

도굴 안된 부여 백제고분서 두개골 2구·금동귀걸이 발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충남 부여의 동쪽 외곽에서 도굴되지 않은 전형적인 백제 고분이 발견돼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내부에서 두 개체의 인골과 금동제 귀걸이가 나왔다.국립부여문

k-odyssey.com

 

연구소에서는 이번 조사 방점을 미도굴이라는 데 찍었다. 옛날에는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무덤을 처녀분이라 했지만,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요새는 이를 피한다. 

백제무덤, 특히 웅진 그리고 사비시대 무덤은 대부분 극심한 도굴 피해를 봤으니, 그것은 동시대 신라 혹은 가야무덤과 비교할 적에 그에 취약한 구조에서 말미암는다. 

백제 무덤은 기본적으로 방을 따고 들어가서 시체를 안치하는 시체소 개념이다. 돌방으로 만들고, 이 돌방은 출입구가 따로 있으니, 이것이 좋은 점 중 하나가 경제성이다. 한 사람 죽어 그걸 매장하고 나서 나중에 그와 관련한 다른 사람이 죽으면 또 문을 따고 들어가서 시체를 쟁여놓았다. 

 

이 지도 보면 부여 중심부에서는 상당한 외곽이다. 

 

다만 이는 도굴이 그만큼 쉽다는 뜻이기도 하거니와, 문만 따면 그대로 내부 침입이 가능했다. 

동시대 문화를 비교할 적에 백제는 신라 가야에 견주어 이른바 부장품이라 해서 껴묻거리가 참말로 볼품이 없다. 가야 신라보다 가난해서가 아니다. 문화가 달랐기 때문이다. 도굴될 것을 뻔히 알았기에 무덤에다가 귀중품을 바리바리 싸넣지 않는다. 

반면 신라는 달라서 졸라 쳐박았다. 바리바리 써서 넣으니 무덤인지 보물창고인지 분간이 쉽지 않다. 

그래서 백제 무덤은 파봐야 도굴이 됐건 말건 건질 게 별로 없다. 그 점에서 무령왕릉은 아무래도 왕과 왕비가 묻힌 곳이라 보물이 쏟아져 나왔을 뿐이다. 

구조를 보면 전형적인 돌방무덤이다.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다가 판돌 서너개로 지붕을 삼았다. 그 남쪽으로 무덤 밖과 통하는 통로가 있다. 연구소는 그 통로가 오른쪽으로 치우쳤다고 했는데 잘못된 표현이다. 무덤은 항상 무덤에 묻힌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무덤 주인공을 기준으로 보면 오른편이 아니라 왼편이다. 

 

대부분 도굴당한 상황에서 백제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장송 의례를 치렀는지는 연구가 쉽지 않다. 그 점에서 이번 부여 초촌면 응평리 백제고분 발굴은 의미가 있다. 물론 도굴이 되지 않았다 해서 착란이 없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매장 당시 모습을 비교적 온전하게 갖춘 까닭이다. 

저 보도 토대가 된 부여연구소 보도자료를 아래와 같다. 

 

도굴 안된 백제 사비기 귀족 무덤에서 인골과 금동 귀걸이 확인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부여 응평리 일원에서 백제 무덤 긴급발굴조사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황인호)는 부여 응평리 일원에서 도굴되지 않은 백제 굴식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墓, 횡혈식 석실묘)을 발견하고 유적의 훼손 방지와 보존을 위한 긴급발굴조사를 지난 6월부터 시행한 결과, 인골 2개(두개골)와 금동 귀걸이 등을 확인하였다.
* 발굴현장: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산1-6번지

부여 응평리 일원에는 백제 사비기 고분이 다수 분포하고 있어 사비도성의 동쪽 외곽의 거점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발견된 고분은 토지 경지 정리 과정에서 천장석이 일부 훼손되면서 그 모습이 드러났는데, 내부에서 인골(두개골)을 비롯한 관재(棺材)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고, 도굴의 흔적도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 부여군, 토지소유자간 긴밀한 협의를 거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내부 바닥 조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 조사한 선례들과 큰 차이는 없다. 영산강유역 매장 패턴과도 근간이 같다. 마한??? 웃기는 소리다. 


 
조사 결과, 고분은 굴식돌방무덤으로, 전체적인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구조는 시신을 안치한 현실(玄室)과 연도(羨道), 묘도(墓道)로 이루어졌는데, 현실의 오른쪽에 연도가 위치한다. 현실의 규모는 길이 220cm, 너비 110cm, 높이 115cm이고 단면 형태는 육각형인데, 이러한 양상은 백제 사비기에 유행하였던 전형적인 석실묘의 형태이다. 고분은 잘 다듬은 대형의 쪼갠 돌(판석, 板石)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 현실(玄室): 시신을 안치한 방
* 연도(羨道): 고분의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
* 묘도(墓道): 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신을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

내부에서는 인골 2개체와 금동제 귀걸이 1개, 관고리 등 목관 부속구 등이 확인되었다. 금동제 귀걸이는 피장자의 위계와 신분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데, 귀족무덤으로 추정되는 부여 능안골고분군, 염창리고분군 등지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또한, 2개체의 인골과 묘도부 토층에서 확인되는 두 차례의 굴광 흔적은 당시 매장풍습인 추가장(追加葬)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 추가장(追加葬): 한번 매장한 이후 추가로 매장

 

귀고리 하나가 보인다. 귀고리인지, 귀걸이인지는 사진으로는 판독이 쉽지 않다. 

 

수습된 인골에 대해서는 고고학,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등 관련 전문가와 공동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피장자의 성별, 나이, 사망시점 등을 분석하고, 더 나아가 백제 시대 사람의 모습을 복원하고, 출토된 목관 부속구를 기반으로 목관을 복원하고 입관, 운구 등과 같은 매장습속도 규명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앞으로도 적극행정을 위해 부여군과 함께 중요 유적뿐만 아니라 비정기적으로 발견되는 매장문화재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지속적인 협업체계를 구축하여, 국민이 빠르게 체감할 수 있는 문화재 긴급조사를 수행할 계획이다. 

 

화면 기준 오른쪽은 두개골까지 명백한데 반대편은 다리 쪽 뼈가 완연하고 두개골은 삭아 없어졌거나 부식이 더 심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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