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詩 & 漢文&漢文法

"똥에 핀 꽃 왕소군王昭君"-석숭石崇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2. 24.
반응형

아래 텍스트는 《옥대신영玉臺新詠》 卷1을 저본으로 삼은 것이다. 제목 왕소군사(王昭君辭)의 '사辭'란 굴원의 대표작을 《초사(楚辭)》라 하거니와, 이는 초 지방 노래라는 뜻이니 이에서 비롯되어 왕소군을 소재로 한 노래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할 듯하다. 이 시에는 아래와 같은 서문에 있거니와, 이 서문이 《玉臺新詠》 찬자의 것인지, 아니면 왕소군사의 원래 저자인 석숭石崇의 것인지 지금 단안은 못하겠지만, 후자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왕소군상. 연합DB..북방 흉노 선우가 왕소군을 왕비로 맞이하는, 혹은 그와 함께 마상 활보하는 모습을 형용한다.



석숭(249~300)은 서진시대를 대표하는 사치가요 권력가였다가 나중에 패가망신했다. 그를 둘러싼 사치 행각은 《세설신어世說新語》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산발한다.

왕명군(王明君)이란 본래 왕소군(王昭君)인데, 曺나라 황제 문제文帝의 휘諱에 저촉된다 해서 이름을 고쳤다. 흉노匈奴가 강성하여 漢에다가 청혼을 하니 元帝가 詔를 내려 後宮 중에서 良家 女子인 명군明君을 골라서 그의 배필로 삼게 했다. 옛날에 公主가 오손(烏孫)에 시집을 가면 비파琵琶로 마상馬上에서 음악을 연주케 하여 길을 떠나는 이의 마음을 위로했으니 明君을 전송할 때도 이와 같았다. 그 새로 지은 곡에는 애상의 소리가 많아 그것을 종이에다가 펼치니 가사는 다음과 같다.(王明君者, 本為王昭君, 以觸文帝諱, 故改. 匈奴盛請婚於漢, 元帝詔以後宮良家女子明君配焉. 昔公主嫁烏孫, 令琵琶馬上作樂, 以慰其道路之思, 其送明君亦必爾也. 其新造之曲, 多哀聲, 故敘之於紙雲爾)

 

我本漢家子  저는 본디 한 왕실 여자랍니다

將適單于庭  선우 궁궐로 시집 가려는데

辭決未及終  이별한단 말 채 끝나기 무섭게

前驅已抗旌  앞서 끌 수레는 깃발 올렸네요

僕御涕流離  마부들이 이별에 눈물 적시고

轅馬為悲嗚  마차 끌 말은 고통스레 우네요

哀鬱傷五內  애잔한 마음에 오장이 상하는듯

泣淚霑珠纓  흐르는 눈물 진주영략 적셔요

行行日已遠  가고 또 가니 날마다 멀어져

乃造匈奴城  이윽고 흉노 도읍에 닿았어요

延我於穹廬  저를 게르로 맞아들이고는

加我閼氏名  저한테 알지라는 이름 덧붙이네요

殊類非所安  저와는 다른 족속이라 편치 않고

雖貴非所榮  귀하다지만 영광스럽지 않아요

父子見凌辱  아버지와 아들이 번갈아 욕보이니

對之慙且驚  그네들 마주하니 부끄럽고 놀랄뿐

殺身良未易  죽는 일도 정말로 쉽지는 않아

默默以苟生  숨 죽이며 살아가는 수밖에요

苟生亦何聊  구차한 삶 어디에다 기댈까요

積思常憤盈  쌓인 그리움만큼 늘 울분 가득

願假飛鴻翼  바라노니 기러기 날개 빌려

棄之以遐征  이 신세 버리고 멀리 달아나고파요

飛鴻不我顧  날아가는 기러기 저는 아랑곳없으니

佇立以屏營  우두커니 선 채 서성이기만 합니다

昔為匣中玉  옛날엔 보석함 구슬 같다가

今為糞上英  지금은 똥에 핀 꽃 신세랍니다

朝華不足歡  아침 꽃도 반길 처지 아니니

甘為秋草並  억지라도 가을풀과 함께할테요

傳語後世人  나중 사람들께 한마디 남깁니다

遠嫁難為情  멀리 시집가선 정들기 힘드노라고


2008 베이징올림픽 기간 전시한 중국 역대 4대 미녀. 왼쪽부터 차례로 초선(貂嬋)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연합DB


"나는 똥 속에 핀 꽃이랍니다." "귀하다지만 영광스럽지 않아요"

무수한 중국 시객이 왕소군이 되어 이리 읊었다. 어떤 경우에도 소군은 슬퍼야 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흉노 땅에선 즐거움이 없어야 했으며,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며, 한 왕실을 그리워해야 했다. 그렇게 소군은 언제나 중원이 그리는 한족의 슬픔과 분노를 대변해야 하는 존재였으며, 그래서 소군은 언제나 이민족에게 한족이 지배받을 수 없다는 표상이었다.

소군이 똥에서 피운 꽃이 되어야 했던 이유다.

여러 왕소군이 있다. 실제의 왕소군...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그 속내는 더더구나 알 수도 없다. 흉노왕비로 간택된 순간, 소군은 내 인생 드디어 땡잡았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살아보니 그런 대로 권력 맛을 알았다. 그래 이 기분에 권력권력 하는구나 했더랬다. 이 참에 나를 내친 더 漢 왕조 묵사발 함 내봐? 이리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저 남쪽 漢族이 생각하는 왕소군은 언제나 그 실상에는 전연 관심이 없어, 소군은 언제나 비련의 여인이어야 했다. 

무수한 묵객이 소군을 그리 그렸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