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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뜨신 아랫목과 온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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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전후 무렵 한강 유역 주거지 발굴 성과를 보면 공중에세 내려다본 모양새가 나름 독특하니 사각형에 가차운 대문이 있고 그것을 지나면 네 모서리 각을 죽인 이른바 말각抹角 방형 혹은 원형에 가차운 몸체시설이 나온다.


부엌 아궁이는 이 몸체시설 한쪽 귀퉁이에 마련하고 한쪽 벽면을 따라 온돌 혹은 이른바 배연排煙시설을 마련한다. 굴뚝은 거의 예외없이 몸체시설 뒤쪽에 마련하기 마련인데 그 상부 시설이 남아있는 경우는 가뭄에 난 콩만 같아 구경이 힘들다. 언제인지 춘천 쪽 발굴현장에 갔더니 기적처럼 굴뚝 상부도 유추할 만한 족적이 있었다.

 

춘천 율문리 2천년전 초기철기시대 이른바 呂자형 주거지. 페치카형에 가깝다. 이걸 온돌이라 불러야는지 모르겠다. 비름빡을 따라 불기운을 돌렸다. 것도 다 돌린 것이 아니고 한쪽만. 부억 아궁이는 내부 한쪽 귀퉁이에다가 두었다. 저기다가 불을 때면 발생 연기는???


이런 주거시설에서 아랫목이 가능했을까? 가능했을 법도 한데 그보다는 페치카 형에 가차울 것으로 본다. 같은 시대 한반도 남쪽엔 온돌은 눈 씻고 찾아보기도 에렵다.

 

수원대 양정석 교수는 통일신라시대 경주 발굴성과를 토대로 당시 신라왕경 지배층은 침대 생활을 했다는 파격의 주장을 내놓았다. 황룡사에서도 온돌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율문리 주거지 비름빡. 저짝이 아궁이고 이짝이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이다. 겨울엔 이쪽 비름박에만 사람들이 덕지덕지 몰려서 잠을 잤나보다. 

 

산림파괴와 밀접한 온돌이 한반도 전역에 보편화하기는 조선시대 이후라고 안다. 따신 아랫목, 군불은 실은 그 역사가 일천하기만 하다. 양주 회암사지 발굴을 보니 온통 방 밑이 고래라 여진족에 가차운 이성계가 아드님한테 쫓겨나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으니 북쪽 출신이니 추위를 안 탄다거나 덜 탄다는 말은 틀렸나 보다.


군불이라면 나같은 촌놈에겐 고구마 감자가 어른한다.

 

*** 이상은 2013. 10. 24 글인데, 그에 붙은 토론이 음미할 만한 대목이 많아 갈무리해 둔다. 

 

(박근태) 사천 늑도유적에 온돌시설이 있는 주거지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율문리 주거지 아궁이. 솥을 걸친 흔적인지

 

(김하나) 완전 남쪽 동네인 사천 방지리유적이랑 조금 윗동네인 대구 달성 평촌리 유적에서도 (온돌이 나왔다.)  
온돌만 정리한 자료들은 아닌 듯하지만 참고할 만한 논문으로 아래가 있다.

 

1. 강미영, 2004,「온돌주거지의 발생과 양상-영남지역을 중심으로」,『가라문화』제18집,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2. 김현, 2006, 「남해안 쪽구들 주거지 등장에 대한 소고-늑도주거지를 중심으로」,『석헌 정징원 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 부산고고학연구회 논총간행위원회.
3. 김나영, 2007년,「嶺南地域 三韓時代 住居址의 變遷과 地域性」, 영남고고학 제43호 pp.59-96
4. 김나영, 2009,「영남지방 원삼국시대의 주거와 취락」 『영남지방 원삼국, 삼국시대 주거와 취락』 1권, 영남고고학회.
5. 공봉석, 2008, 『경남 서부지역 삼국시대 수혈건물지의 구들연구』, 한국고고학보 66, 한국고고학회

4번 자료에 김나영 선생이 정리한 표가 있는데 그중 온돌시설 여부를 표시해 놓은 게 있다. 

 

(박승규) 쪽구들로 되어 있는...벽쪽으로만 돌려져 있으니 아랫목 같은 구들과는 조선시대 온돌과는 다를 듯...페치카 성격이 많다고 보인다.

 

율문리. 숯검댕이는 벽체 혹은 지붕에 걸친 목재 흔적일 것이다. 이런 흔적이 제법 나왔는데, 이를 토대로 하는 상부구조 복원안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도 토기쪼가리에 정신이 팔린 고고학도 집단이라...

 

(이정호) 전남 지역에도 삼국시대 부뚜막에서 벽을 따라 만든 점토구들 흔적이 심심찮게 보인다. 발굴자들은 배연구라고 표현하는데 난방기능이기 때문에 구들이라고 바꾸는 게 어떨지 의견을 내기도 한다.
호남문화재연구원 담양 태목리유적, 장흥 신풍유적 유구사진으로 다수 있을 듯 하다.

 

(서영일) 고 김남응 교수가 쓴 온돌책이 있음. 단국대 출판부

 

(이영덕) 구들이나 온돌은 바닥난방의 개념으로 사용된 용어인 반면 페치카는 공간난방 방식이다. 점토구들이나 쪽구들로 불리는 것도 공간난방이다. 등짝 뜨시게 지지지 못하는. 온돌. 바닥난방 방식은 아메리카인디언에서부터 중국 캉. 로마 하이코퍼스트?까지 전 세계에 걸친 난방 방법의 하나다. 단지 한반도에서 보편화했다는 의미가 클 겁이다.
삼국시대 이전 구조를 구들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 고민한다.

 

연해주에서 발굴한 19세기 온돌. 이건 우리한테 익숙한 전형적인 온돌인 듯 보인다. 알게 뭐야? 보질 않았으니. 



(김충배) 구들의 핵심은 깔돌. 그걸 고래에 걸쳐 편평하게 깔았다면 그것이 온돌이 아니고 무엇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오녀산성 주거지들의 쪽구들 온돌을 생각하며.

(이영덕) 공간난방의 뻬치카 역시 내화벽돌을 달군다. 예전에는 돌이었지만. 축열재로서 흙이냐 돌이냐의 문제보다는 난방방식이 주거상면을 달구느냐 아니면 공간을 댑히느냐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지. 그런 관점에서 쪽구들은 공간난방 목적이 클 듯

(이정호) 온돌구조가 아니라서 전통구조에서 명칭을 얻기 힘들 듯하다. 적절한 제안이 있기 전까지는 쪽구들로 표현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배연구는 기능상...

 

(이영덕) 배연구는 지적하신 대로 냉갈 나가는 통로임과 동시에 여열로 축열하는 기능을 가진 다목적

(김충배) 동시에 발생한 공해물질을 접근한 다른 주거에 영향을 덜 주도록 축저시키는 기능을 갖추고 있으니 이른바 개자리에 잡히는 검댕.

 

풍납토성 미래마을지구 나-10호 주거지. 보다시피 이곳에서는 똥구녕에 해당하는 데다가 아궁이를 마련했을 뿐이다. 보온? 온기? 가능했을까? 것도 땅바닥을 파고 들어간 마당에? 벽체 기둥 박음 그대로 확인됐다. 

 

(이영덕) 냉갈보다 무서운 것이 불티 날리는 일이다. 숯을 사용하면 냉갈 안 나고 열효율 좋고. 불의 흐름이 관건일 것이다. 좁은 아궁이에서 불을 효율적으로 피울 수 있는 구조. 개자리는 아니고 벽체 단열이 더 중요.

 

(김충배) 돌 깔고 진흙 떡칠하잖나? 

(이영덕) 그것이 열기고리를 집중시키는 의도 

(이정호) 지금도 원주민들 고상주거는 나무바닥에 화덕을 두는데 숯을 사용하더라. 나무 잔가지도 넣기 때문에 불꽃이 살랑 살랑 춤추는데도 나무기둥 곁 화덕에서 요리를 한다. 내가 본 유적 한계는 있지만 부뚜막 크기로 봐서는 숯을 주로 사용한 듯 하다. 설사 나무가지를 태우더라도 화재 우려는 크지 않을 듯 하다. 지붕 높이가 생각보다 높았을 것 같다. 지상으로 벽체가 올라오는 반수혈식주거지 구조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에..

 

아차산 4보루 한 건물터 내부. 이게 온돌? 식당이라 하면 좋겠다. 혹 아는가? 저짝에서 짜장면 말았는지? 

 

(김충배) 불티가 화재를 일으킨다는 생각들에 난 반대다. 신석기주거군 중에서 화재주거지들이 있지만 과연 내부 발화인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설사 내부 발화라고 하더라고 실화가 많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주거를 영위하기 위한 시설을 만들었고 충분히 그런 기술이 있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내부가 축축하고 눅눅하고 까실까실한 짚 벽체만 썼을까? 판재로 벽체를 만들고. 내부에 목제 마루를 깔고. 온도를 유지하고. 통기를 자유롭게 할 높은 지붕. 기둥재를 매근하게 다듬는 도구들. 결속을 자유롭게 할 노끈들.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안락한 주거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해주 블로치가 유적. ㄷ자형으로 구들? 을 돌린 점이 특징이다. 



(이정호) 주거지 내부에 뭉쳐진 진흙덩어리 이상하리만큼 넓게 깔려있기도 하더라. 진흙 덧칠한 벽체구조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추운 곳, 홋카이도 아이누족 전통주거도 방 한가운데 불꽃이 활활 타 오르는 화덕을 두었더라. 말씀대로 우리 선입견과 다른 경우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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