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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마왕퇴 한묘馬王堆漢墓와 여성미라

by taeshik.kim 2019.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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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서 1970년대 초반에 발견되고 발굴된 이른바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 미라mummy 관련 단행본을 서울대 의대 신동훈 교수와 내야 한다. 

아직 이 작업에 본격 내딛지는 않은 상태에서 이런저런 데다가 간헐적으로 소개한 마왕퇴 한묘 단면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사진 자료에 기간 신동훈 박사가 덧붙인 설명이 있으므로, 이 자리를 빌려 그것들을 정리하는 기회도 삼고자 한다. 



마왕퇴 한묘 발굴현장이다. 堆란 언덕 혹은 둔덕이라는 뜻으로, 언덕 이름이 마왕퇴라 한다. 호남 장사평야 동쪽 한가운데 불룩 솟은 언덕이 있어 그것을 마왕퇴라 부르는데, 그 까닭은 이 언덕을 당이 해체되고 전개된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를 구성한 나라인 초楚나라를 세운 마은馬殷이라는 왕이 묻힌 무덤이 있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소련간 대립이 격화일로를 치단던 1971년 겨울, 호남성 주둔군이 장사병원 지하병실과 수술실을 마왕퇴에 짓고자 굴을 파고 들어가다가 뜻하지 않은 무덤을 발견하게 되니, 이렇게 해서 이곳은 전한시대 초기 일가족 세 사람 무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유방은 전국을 봉건제후들을 두어 다스렸으니, 장사 일대에는 장사(長沙)라는 제후국이 있었다. 

이 마왕퇴 무덤 3기는 이 장사국 군왕을 보필한 승상으로서 대후(軑侯)라는 봉작을 받은 리창(利倉)과 그의 부인, 그리고 이들의 아들 묘임이 주인으로 드러났다. 마왕퇴 무덤 3기는 발견 발굴 순서에 따라 차례로 마왕퇴 한묘 제1~3호라는 명칭이 부여됐으니, 가장 먼저 발굴된 1호 묘가 대후 부인묘였다. 이 1호묘는 특히 그 시신 보존상태가 완벽해 놀라움을 선사했다. 

2호묘는 리창 무덤이고, 3호묘가 확실치는 않으나 그의 아들 묘일 가능성이 크다. 3호묘에서는 각종 문자자료가 쏟아져 나와 충격에 빠뜨렸다. 

앞 사진은 마왕퇴 한묘 발굴현장인데, 다른 두 무덤을 봉합했지만, 유독 3호묘만큼은 파낸 자리를 그대로 보존해 보여준다. 저 입구 간판 한쪽으로 아치형 콘크리트 굴 입구가 보이는데, 저것이 바로 마왕퇴 발굴을 가능케 한 방공호 입구다. 



3호묘 현장이다. 간단한 보존처리를 한 까닭에 흙이 계속 붕괴하는 상태다. 저런 모습으로 언덕을 파고 내려가 묘광墓壙을 만들고 저 안에다가 나무로 짜서 관棺과 곽槨을 조립해 넣었다. 관이 시신을 직접 안치하는 이너 서클이라면, 곽은 그것을 두른 또 다른 관이다. 집으로 치면 관이 방을 두른 벽, 곽은 집안 전체 테두리인 담벼락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보다시피 묘광은 단을 져서 파고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흙이 붕괴함을 막고자 하는 고안이지, 별 뜻이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저런 방식으로 땅을 파고 내려간다. 수직으로 파고 내려간다면? 토사가 붕괴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 당연한 것을 무식한 고고학도들이 무슨 대단한 기술, 혹은 양식인양 되는양 각종 전문용어 써가며 대서특필하는데 새빨간 사기다. 

그렇다면 사진 앞쪽 중앙 통로 같은 시설을 무엇일까? 이것도 암것도 아니다. 저 묘광에다가 관과 곽, 그리고 각종 기물을 넣고자 했을 때 어찌하겠는가? 통로를 뚫어야지 않겠는가? 물건을 내리는 곳이다. 이 또한 암것도 아닌데, 고고학도들은 대서특필한다. 이런 당연한 것들의 대서특필은 저것을 축조한 당시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일이다. 



이곳 마왕퇴 출토 성과는 장사시 중심 구역에 있는 호남성박물관이라는 곳에서 집중 전시를 하거니와, 이 박물관은 호남성을 대표하는 박물관이지만, 실은 마왕퇴 전문박물관이라 불러도 대과가 없을만큼 집중적으로 이것으로써 장사를 해먹는다. 

나는 이 박물관을 두 번 방문했는데, 대략 5년 터울이 나지 않는 그 두 시기에 마왕퇴 성과, 개중에서도 1호묘 주인공 여성 미라 전시와 관련해 중대한 변화를 감지한다. 
 
그에서 다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전 방문에서는 미라는 주요 내장까지 분리해 대부분을 전시했지만, 그 뒤에 가보니 미라 하나만 전시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들여놓아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사자 명예를 존중하는 기풍이 생겨나 이런 변모가 생긴 줄로 안다. 긍정적인 변화라 할 만하다. 

대신 그 생생한 미라 다양한 면모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한테는 실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은 철수 이전 촬영해 둔 것 중 골랐다. 

바로 앞 사진 내장이 무엇인지는 신동훈 박사가 추후 자세한 설명이 있을 줄로 안다. 

신박사 설명 블라블라 
 


이것도 내장 중 일부다. 신 박사 설명에 의하면 이는 다음과 같다. 

가운데 위아래로 긴 구조물이 abdominal aorta, 복부 대동맥을 세로로 잘라 열어 젖힌것으로, 빨간 원 안의 까만 점이 atheroma, 동맥경화 때문에 생긴, 혈관 내벽에 생긴 변화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미라에서도 동맥경화 케이스가 나왔었는데 거의 비슷한 소견이 보였다. 저 정도 보존상태면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발굴되었다면 아마 전장 유전체가 다 분석되었을 거다. 사람 DNA 전체를 다 읽는 정도의 분석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저 동그라미 안 점은 정확히는 atheroma에 hemorrahge가 생긴 거다. 출혈...미라 부검 결과 한국에서도 거의 비슷한 소견이 보였기 때문에 생소하지는 않다. (이거 보면 신 박사가 돌팔이 의사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다만 저 시점에 신 박사가 의사면허 장롱에 박은지 이미 25년이 흘렀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참...의사면허는 장롱이 아니라 교수 연구실 벽에 걸어두더라.) 


이것이 현장에서 건져다 놓은 목관 목곽이다. 3기 중 몇 호 묘인지는 아리까리하다. 암튼 저 시기 이 지역 지배권력층 묘제가 이렇다는 것 정도로 보아주기 바란다. 

미라 자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를 기회가 있으므로 그때로 미룬다. 

대신 다시 신 박사 입을 빌려 마왕퇴 미라 전반을 정리한다. 

마왕퇴 연구가 70년대 중반에 이루어져 의학적 보고는 80년에 있었는데 수준이 무지하게 높다. 요즘같으면 Nature Science 나갔을 거다. 

한데 그 연구결과가 영어권에는 보고되지 않았다. 최종 결과물은 중국어로 단행본, 혹은 중국어 잡지에 보고되고 끝났다. 그래서 서구 학자들은 마왕퇴는 알아도 마왕퇴 의학적 분석 결과를 거의 모르는 실정이다. 제대로 (영어로) 학술보고 된 적이 없어서다. 

마왕퇴 연구가 문화혁명의 여진이 다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게 정말 대단한 거다.. 개인적으로 저 연구를 진행한 중국 고고학자, 의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수준이 정말 높다. 서구에서도 저 정도 저 당시에는 하기 힘들었다고 봐야 한다. 

마왕퇴 발굴 보면.. 미라가 나온 1호묘. 이거 발굴할 때는 정말 처참했더라. 쓸데없는 짓 한다고 갖은 구박 다 받아가면서 발굴했다더라. 4인방이 마왕퇴 유물 보고 이거는 우리 노동자들이 반나절이면 만드는 걸 뭐하러 파냐고 했다잖은가? 

그런 시대를 지나왔으니 지금 북경대 총장 같은 양반이 나오는 거다. 그 양반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양반 세대 전체가 다 그런 듯하다. 

여담이지만 중국은 80년대까지는 마왕퇴 미라를 미라라고 부르지 않았다. 중국은 한대漢代 미라와 보다 후대의 송~청대 미라를 모두 고시古屍, 옛날 시신이라고 부르더라. 그래서 이것은 미라가 아니다 라고 선언한다. 서구 학계 입장은 이와는 좀 다른데, 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 있을 때 구체적으로 적어보겠다. 

(미라와 고시는 차이가 뭔가라는 질문에) 서구는 자연적, 인공적 모두 미라로 본다. 중국이 계속 저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아마 구체적 논의가 진행이 되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80년대 이후 그 맥이 끊긴 것 같다. 마왕퇴 1회성 연구였던 셈인데 그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행이 안 된 거다. 

지금은 중국이 이건 미라가 아니다, 라는 선언적 보고가 한 것만 중국 내에서 받아들여지는 상태이고, 서구에서는 그냥 미라로 분류해 버리는 것이 통례인 듯하다. 

미라의 정의는 다음을 참고하자. 

Mummies are human (or animal) remains displaying preservation of non-bony tissues (Lynnerup, 2007). The term mummy originated from the old Persian word, mumeia, or mum, meaning bitumen or pitch (Lynnerup, 2007). We call them mummies when at least a reasonable amount of soft tissue is preserved to an extent that the skin or other elements such as hair, muscles, ligaments, tendons or even internal organs can be observed (Lynnerup, 2007).

이집트 미라가 정말 많기는 한데 20세기 들어 고고학 발굴 보고가 전 세계에서 이어지면서 세계에는 정말 많은 "미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이런 드문 발굴이 옛날 분들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과학적 자료를 주고 있기 때문에 이 전체를 포괄하는 단어가 뭔가 하나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이집트 "미라"라는 단어에 담긴 뜻을 보다 넓게 조정한 것 아닐까 한다.

최근에는 과거 통상적으로 대중 사이에서 통용되던 온몸에 천을 휘감은 이집트 "미라"라는 의미보다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우도 요즘은 거의 미라라고 부른다. 그런 추세를 반영한다면 마왕퇴도 "미라"가 되겠다. 절대로 그렇게 못 부르겠다고 중국 사람들이 주장한다면 그 또한 어쩔수 없는 것이겠지만...

덧붙이자면 미라라는 것이 이집트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다. 인공적으로 미라화를 시도한 최초 사례는 남미다. Chinchorro mummy라고 검색하시면 아마 나올 텐데 고고학적으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인공적 미라다. 

중국의 경우는 마왕퇴처럼 마르지 않아 딱딱하게 굳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되었고 내장 기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마왕퇴형 시신"이라고 부르자는 거다. 그 기준에 따르면 중국 송대~청대에 발견되는 미라도 모두 "마왕퇴형 시신"에 포함되는 것이고...조선시대 회곽묘 미라도 "마왕퇴형 시신" 이 되는 셈인데 이건 내가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이 대목에서 신박사는 ㅋㅋㅋㅋ를 붙임)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을 제외하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이집트, 페루에는 초반에는 자연적으로 미라가 만들어지다가 후대에 들어 인공적 미라가 만들어진다. 전자를 미라 이외의 이름으로 부른다면 분명히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 "미라"를 포괄해서 효율적으로 부르기 매우 어려워진다. 

이집트도 고왕국 시작하기 전에도 미라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분명히 고왕국 개시 이후 제대로 제작되는 "인공적 미라"와 선후관계,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한다.

(일반인으로서 본다면, 미이라의 어원이 위키대로 포르투갈어 mirra에서 왓다고 하면 방부제라니까 자연시체는 제외해도 될 것 같고 Lynnerup 말대로 mumeia라고 하면 더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얄 듯 하다는 반응에 대해) 중국학자 저 사람 주장 빼고는 전부 다 미라를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빼고는 이의의 여지가 별로 없다. ㅋㅋ

나중에 중국에서 이쪽 연구하는 사람이 다시 나오게 되면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현재로선 35년 전에 이렇게 선언하고 사라진 중국 측 주장을 따라가기엔 어려운 실정이다. 

photo by 이병윤

photo by 이병윤



(미라 전체와 얼굴 사진을 보고는) 안구와 혀가 밖으로 밀려 있는 것은 저 분이 돌아가신 후 일정 시간 동안 내부에서 부패가 진행하여 가스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히 부패가 처음부터 멈춘 것이 아니고, 일정 시간 동안은 부패가 진행되다가 서서히 멈춘 거다.

(내장까지 전시한 사진에 대해) 전시 부분에 대해서는 역시 이론이 많을 것이다. 아마 요즘이라면 저런 수준의 전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마왕퇴 발굴 기록을 보면 저 기간이 문혁기간이라 발굴된 분에 대한 계급적 증오를 의도적으로 고취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아마 저 당시 발굴된 분에 대해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분위기상 온전치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발굴 후에 확보된 지식은 인민들에게 나온 그대로 보여주라는 식의 명령이 또 위로부터 계속 내려갔던 것 같고...저 분이 처음 발굴 된 당시 장사시 시민이 수만 명이 구경하려고 몰려들어 그야말로 폭동 전야였다고 한다. 그때 그래서 전시되었던 그대로 지금껏 내려온 결과물 같기는 하지만...개인적으로 미라 전시에 대해서는 나도 부정적이라. 적당한 수준의 조정이 앞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샘(김태식-인용자) 위 포스팅을 보니 요즘은 장기는 전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잘 된 일이다. 아무래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중국이 거기까지 고려할 수준이 못된 탓이 제일 큰 것 같다. (말은 이렇게 해도, 신박사 본인은 무척이나 미라 내장 등등을 속속들이 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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