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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그 이웃

[마왕퇴와 그 이웃-109] 운몽대택 (6) -가의賈誼

by 신동훈 識 20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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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의賈誼(기원전 200~기원전 168)라는 사람이 있다. 

지금도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전통시대에는 매우 높게 평가받던 사람이다. 

사기史記에는 굴원과 함께 《굴원가생열전屈原贾生列传》으로 묶여 있고

한서漢書에는 따로 혼자 입전되어 있다. 

이 사람의 글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이 읽혔냐 하면

통감절요에는 한 문제 시대 막대한 분량이 가의의 글에 할애되어 있다.  

고문진보에도 두 편이나 글이 후집에 올라 있는데 

한유 이전 굴원과 도잠, 제갈량의 글이 각각 2편씩만 고문진보 후집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가의에 대한 유가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 때 당 태종과 위징의 관계가 직간의 예로 유명하지만 

사실 위징의 간언은 짜고 치는 측면이 강했던 반면

가의의 시대는 간언을 잘 못했다가는 목이 날아가고 궁형을 당하는 

황제의 전제권력이 어마어마하던 시대였는데, 

그럼에도 가의는 할 말 다 하고 살았고 이 때문에 정치적 부침도 잦았다. 

이 가의가 좌천되어 간 곳이 바로 장사였다. 

그가 장사로 좌천되어 갈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贾生为长沙王太傅三年,有鸮飞入贾生舍,止于坐隅。楚人命鸮曰“服”。贾生既以适居长沙,长沙卑湿,自以为寿不得长,伤悼之,乃为赋以自广。

가의가 좌천되어 간 장사는 "비습卑湿"하여 (땅이 낮고 습하여)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애석하게 여겨

스스로 부를 지어 자신이 못다한 말을 했다는 뜻인데. 

여기서 장사 땅이 "비습"하다는 것이 바로 이 곳이 저습지라는 뜻이다. 

가의가 장사로 좌천되어 장사왕 태부로 내려 간 것이 기원전 176년이고, 

마왕퇴 한묘에 묻힌 이창이 장사왕長沙王의 상을 역임하며 대후로 봉해진 것이 기원전 193년이고

죽은 시점이 기원전 186년이니 

가의가 이창을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 아들은 봤을 가능성도 있는데 

아무튼 이창이 대후로 살아 있을 당시에 가의가 장사로 내려가는 것을 

죽으러 가는 것처럼 묘사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에 대한 중원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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