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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이야기/마왕퇴와 그 이웃

[마왕퇴와 그 이웃-116] 가난한 장사국, 화려한 대후의 무덤

by 신동훈 識 202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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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왕퇴 한묘가 조성될 때까지도 이 지역 장사는 인구도 많지 않은 제국의 변방 지역에 불과했다. 

서한 시대의 인구밀도를 추산한 결과를 보면, 

당시 황하유역 인구밀도는 평방킬로미터당 50-100명 사이였는데

장사국 인구밀도는 같은 면적에 겨우 3.3 명이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가의가 기원전 174년에 쓴 글을 보면, 

한나라 초기 장사국 총 가구수는 겨우 25,000여 호 정도로 총 인구는 기껏해야 11만-12만 정도로 추산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장사국은 당시 한반도에 있던 낙랑군, 현도군 보다도 훨씬 적은 제후국이었던 셈이다. 

시기는 좀 늦지만 후한 원시 2년 (서기 2년) 당시 낙랑군 인구수는 40만 명이 넘어 있었고, 

현도군도 20만이 넘는 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전국시대 초나라 중심지에 속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양자강 일대 개발 자체가 황하 유역에 비해 낙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국세가 약한 장사국 승상이었다고는 하지만, 

대후 이창 일가 무덤은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보다 훨씬 큰 낙랑군 현도군 등지에서도 이 정도 규모 무덤이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이창의 봉지인 대국 700호 분의 조세를 대후에게 주었다고 하니 이러한 거대한 무덤의 출현은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 아닐까. 

이 시대 전공자들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인구 25,000호짜리 장사국 승상의 무덤이 이 정도였다면, 

낙랑군 지역에서 보고된 한대 무덤에 묻힌 이들은 과연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었을까. 

평양에서 보고된 군현 무덤 중 석암리 9호분이 가장 최대 최고 수준 무덤이라는 것인데 

이것조차도 700호분 조세만 수취한 대후 무덤에 훨씬 미치지 못하니, 

낙랑 군현을 최정상급에서 지배하던 이들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죽고 나면 모두 대륙의 고향으로 실어갔을까. 

낙랑군현 관련 무덤 중 최대급이라는 석암리 9호분. 이 무덤은 높은 신분에 맞게 관곽을 제대로 포개어 쓴 것 같지도 않다. 이 무덤에 묻힌 이의 신분은 도대체 무엇일까.

 

[편집자 주] 

우리는 계속 국사가 아닌 세계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사라는 좁은 테두리에서 죽어나사나 평양 일대 파 봐야 보일 것도 없고, 보인다 해서 그것이 어찌 전모全貌이겠는가? 

한반도 안에서 아무리 파 봐야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 시야를 좀 더 넓힌다고 고작 가는 데가 요동 요서라, 우리가 말하는 세계사는 적어도 당시 동아시아적 맥락을 말한다. 

그 동아시아 맥락에서 마왕퇴 한묘를 보아야 하며, 나아가 저에 묻힌 사람들보다 한 등급 혹은 두 등급은 상위에 위치하는 제후국왕 무덤을 봐야 국사가 아닌 한국사 해명에 한 발짝 더 다가선다.

우리가 말하는 리창 일가 대후가 한창 활동하던 무렵은 위만조선 전성기다.

이 위만조선 전성기에 그 한 제국 경계밖에서 조공과 책봉 관계이기는 위만조선과 마찬가지인 남월국은 국왕 무덤이 발견공개되었고, 그 같은 시대 그 제국국왕 무덤 역시 적지 않은 숫자가 곳곳에서 보고되었다. 

중산국왕 유승 부부묘는 물론이고 황제 자리 있다가 쫓겨나 제후국왕으로 강등된 해혼후 무덤으로 기적으로 발견되어 공개되었다.

이들과 같은 맥락에서 위만조선 왕가 무덤은 접근해야 하며, 당연히 그 위만조선에 복무한 승상 이하 주요 권력자 무덤은 저 마왕퇴 한묘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저에 걸맞는 위만조선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한반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훗날 발견될 여지까지 제껴버려서는 안 되겠지만, 이 점을 하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왜?

역사는 세계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굳이 이 땅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저 반대편, 그러니깐 마왕퇴 한묘나 남월국 무덤에서도 뜻밖에 싱겁게 풀릴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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