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동경대 이야기를 해 보자.
일본 근대교육제도에서 메이지 초년에 원래 일본 전체에서 대학은 동경제국대학 단 한 개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국대학령에 의해 동경대 외에 쿄토대 등 다른 제국대학이 추가로 설치되면서 달라지게 되었지만,
아무튼 메이지시대의 교육제도 초반은 상당기간은 일본에 대학이 단 한 개만 있는 상황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원래 메이지 정부의 방침은 동경대를 막부의 공식적인 최고학부인 昌平坂学問所를 중심으로 만들려고 했었다.
昌平坂学問所는 강항으로 부터 감화받아 일본최초의 본격적인 성리학자가 된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이 막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것으로 에도 막부의 명실상부한 최고학부가 되었다.
이 학문소의 유지가 일본 동경 간다역 근처에 가면 아직 남아 있는데 지금은 "유지마성당湯島聖堂"이라 부른다.
우리로 친다면 성균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동경에 가실 일이 있다면 꼭 한 번 가 보시기를 권한다.
아무튼 昌平坂学問所는 에도 시대 내내 관학의 중심지로서 일본의 정통파 성리학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 때문에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 대학을 설립하고자 할 때 3개의 기관을 합하여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첫째는 막부 관학의 중심이었던 昌平坂学問所, 그리고 일본 난학의 막부 교습소였던 양학소(개성학교), 마지막으로 종두소가 발전하여 성립한 의학교 이 셋이 모태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昌平坂学問所는 대학의 중심으로서 처음에는 '대학본교' 하면 바로 이 昌平坂学問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막부 학문소를 중심으로 대학을 만들고자 한 메이지 정부의 구상은 몇년 만에 파탄을 맞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아무튼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모자라는 인력, 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메이지 이전의 여러 전근대적 교육기관을 그대로 활용했는데 여기에는 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조선이 식민지화하면서 이전까지 조선 관학의 최고학부였던 성균관은 끝내 대학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경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전전하다 결국 사립대학으로 바뀌게 되는데
조선 성균관의 운명이야 말로 정말 식민지로 마감한 조선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하였던 것이라 할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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