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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의 어제와 오늘(2), 서울역사박물관 망우동 특별전 - 망우리 공동묘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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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공동묘지는 1933년 개장하고

딱 40년 만이 1973년 4만7천754위가 되면서 만땅이 되어 새로운 무덤을 쓰는 묘지로서는 기능이 끝난다.

이 기능 정지는 대규모 탈출을 불렀으니 무덤을 뽑아 옮겨가거나 파묘한 것이다.

그리하여 2023년 10월 현재는 6천579위만 남았다.


 

1973년 현재 망우리 공동묘지



망우리 혹은 망우동 역사에서 무덤은 뺄 수 없다. 그 등장 자체가 앞서 본대로 이성계 건원릉 점지에서 시작하는 까닭이다.

지금도 동구릉을 가보면 철조망 너머가 망우동 묘지다.

사대문 안에는 무덤을 못 쓰게 했으니 다른 양반 가문도 이곳에다 무덤을 많이 썼다.

앞서 소개한 1760년 망우동지에도 벌써 "땅이 있으면 명칭과 경관이 있고, 그 후에 무덤이 있고 사람이 있고 풍속과 문헌이 있다"라 쓸 만큼 망우동 일대는 조선후기에 이미 저승의 공간이었다.


1941년 당시 서울 주변 공동묘지



총독부는 이런 망우동에다 축구장 240개 정도 크기에 해당하는 공동묘지를 만든다.

조선을 접수한 일본은 무덤을 허락 없이 만들지 못하게 한다. 1912년에 '묘지규칙'을 만들어 공동묘지에만 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조치는 한국사 흐름 근간을 바꾼 혁명이다.

이 '묘지규칙'에 따라 미아리 이태원 등 공동묘지 19곳이 정해진다.

경성부 안에 인구가 늘자 1926년 미아리는 추가로, 망우리에는 새로 공동묘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후 1933년에 축구장 240개 크기의 '망우리 공동묘지'가 문을 열었다.

이런 역사는 망우동에 두고두고 짐이 되기도 하는데 공동묘지 좋아하는 사람 없다.

그래서 월하의 공동묘지도 단장을 하게 되는데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간판을 바꾸고는 이제 문화를 팔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인지 이곳에는 유관순이며 방정환이며 이중섭이며 문일평이며 송석하며 오세창이며 하는 상품성을 갖춘 이들이 여전히 잠든 까닭이다. 심지어 아사카와 다쿠미 같은 일본 저명한 문화인도 있으니 말이다. 






묘적대장 墓籍臺帳  Grave Registers 라는 문서가 있다.

개인묘지의 등록사항을 손으로 적은 장부다. 묘지번호, 사망일자와 원인, 매장일자 등의 내용이 담긴 이 시대 일급사료다.

누가 분석하면 논문 수십 편은 나온다.




1990년대 분묘 도면이다. 망우리공원묘지 관리를 위해 여러 구역을 설정하여 분묘의 위치와 숫자를 표기한 도면이다.

이 중 1대구역의 도면을 통해 분묘를 어떻게 관리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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