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채奇采는 고려말 권신 기철奇轍(?~1356)의 현손玄孫이다. 《성종실록》 5년 4월28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논찬이 실렸다.
사신史臣이 논평한다.
“정효상鄭孝常은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괴과魁科에 발탁되자 기씨奇氏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아내)의 집은 상당히 재산이 많았으며, 아내의 성격은 교만스럽고 사나와서, 정효상을 대하기를 노예처럼 해서 손발도 제대로 놀릴 수 없게 했다. 더욱이 그 장모는 더욱 성격이 사나와 때로는 정효상에게 매질까지 해댔다. 정효상이 일찍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었을 때는 관기官妓를 지독히 총애해서 심지어는 몰래 그 집에 가서 자고 오기까지 했으니, 그는 이 정도로 행검行檢(행동의 절제)이 없었다.
어세공魚世恭은 성격이 경솔하고 허세를 부리는 데다 익살을 좋아했다. 심정원沈貞源이 버린 처를 후취後娶의 아내로 맞이하니, 이는 그 집안이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여론이 그르다 했다.
이예李芮는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공혜왕후恭惠王后 병이 위독한 시기임에도 잔치를 베풀고, 좌승지 신정申瀞 등을 초청하여 기악妓樂을 크게 벌려 놓았다가 대리臺吏에게 적발되자, 신정은 두려워하여 몰래 이예 집을 찾아가 간청하고는 그 일이 무마되었었다.
그 뒤에 은천군銀川軍 이찬李穳이 종친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렸다가 역시 대리臺吏에게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그것을 탄핵彈劾하니, 마침 조참朝參하는 날이라 조관朝官들이 인정전仁政殿 문밖에 모여 있었다. 찬이 (대사헌) 이예를 보고 면책面責(대놓고 깜)하기를, ‘재상宰相이 법을 범한 일은 숨긴 채 아뢰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종친은 탄핵하니, 그렇다면 법사法司라는 의의意義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오?’ 하니 이예가 부끄러워했다.”
이날 좌의정左議政 최항崔恒이 죽은 일을 기록한 졸기卒記가 실렸는데 이에서도 이와 관련된 일이 보인다.
"기채奇采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최항의 친구 사위인, 이배륜李培倫이란 자의 사위였다. 그 기채에겐 딸만 하나 있었다. 그 딸이 정효상鄭孝常 집안으로 시집갔는데, 부유하게 잘 사는 집안이라 최항이 그 재산을 탐내서 근족近族임도 혐의하지 않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아들 최영호崔永灝의 아내를 삼으니, 온 조정이 비난했다. 최항의 아들은 최영린崔永潾과 최영호崔永灝인데, 최영린은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그런데 성품이 잔악하고 혹독하여 비록 처로妻孥들이라도 형편없이 학대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돈 때문에...
기채의 장인은 이배륜李培倫이니 정효상을 매질한 장모가 바로 이배륜의 딸이다. 저와 같은 행적 때문인지 조선 사대부한테 정효상은 공처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회자되었다. 《연려실기술》 등지에도 이 이야기가 실렸으니 말이다.
누가 정효상이 저토록 수모를 인내하여 그 재산을 차지했느냐고 물었는데 그렇지 않나 한다. 그 집안 문중토지가 고양 일대에 지금도 어마어마하게 남은 것을 보면 말이다.
오늘 "재산 많은 외동딸이라면 내 죽는 것만 아니면 감내하리라" 작정한 분이 혹 계시려나 모르겠다.
같은 사족이라 해도 그네끼리 차별이 있었다.
《미암일기眉巖日記》를 쓴 유희춘柳希春(1513~1577)도 기대승奇大升(1527~1572)보다 재산도 많고 지위도 높았지만 혼담은 거절당한다. 이유는 문지門地(가문의 지위)가 낮다는 것이다.
고경명髙敬命(1533~1592)의 경우도 3대가 문과에 급제한 집안이고 재산으로는 따를 자가 없는 데다 문과에 장원까지 했다. 그럼에도 문과에 턱걸이로 급제한 윤두수尹斗壽(1533~1601) 윤근수尹根壽(1537~1616) 형제와 2등을 한 기대승보다 진급에서 밀린다. 그래서 권력자 이량한테 접근하게 된다. 《명종실록》에 고경명과 그 아버지 고맹영高孟英(1502~1565)이 이량李樑(1519~1582)의 응견鷹犬이라 기록되었다. 이때문에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고경명은 귀양을 간다. 박순 아니었으면 정치 생명 아웃이었다.
요샌 매맞는 사위가 더 많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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