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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홍문록弘文錄, 출세의 보증수표

by 한량 taeshik.kim 2020. 10. 28.

조선에서는 출세에 이르는 정로가 과거 급제였지만, 과거 급제만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아니었다. 신분제가 공고한 사회였다.

일전에 포스팅 했던 문과급제자 만 갈 수 있는 자리로 규정된 '병용문관' 해당 관직 가운데 청요직에 갈 수 있는 사람도 따로 자격이 있었다. 바로 홍문록에 들어야 했다.

문명을 세상에 떨칠 정도가 되거나 백그라운드가 우수해야 홍문록에 들 수 있었다. 이들이 대부분 청요직을 독점하고 당상관에 이를 후보군이었다.

조선에서는 과거에 급제해도 임용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정조 때가 심해서 정순왕후가 섭정할 때 과거에 급제하고도 임용되지 못한 사람을 파악해 올리라고 하는데, 많은 이가 고인이 되었어도 임용조차 되지 않은 급제자가 80명 가까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홍문록(弘文錄)에 대한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홍문록의 시초는 1471년(성종 2) 예문관원의 후보자를 간선한 예문록에서부터이다. 그 뒤 1478년 예문관에서 홍문관이 독립된 뒤 홍문록 제도가 시작되었다.그 절차는 홍문관의 부제학과 동벽(東壁 : 直提學∼應敎)과 서벽(西壁 : 校理∼修撰)이 모여 홍문록이 될만한 사람들을 의논한 뒤 권점(圈點)을 하여 권점을 많이 받은 사람을 본관록(本館錄)으로 선정하고, 그 권점책을 이조를 거쳐 정부(政府 :도당)에 보내면 정부에서 대신들이 본관록을 중심으로 빠졌거나 잘못된 것이 있는지를 검토한 뒤 그 수를 조정하여 정부록(政府錄)으로 결정하였다.홍문록의 간선대상은 문장과 학행이 훌륭하고 좋은 가문의 출신으로서 홍문관원으로서의 자질과 조건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였다. 홍문록은 3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선정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필요하면 수시로 이루어졌고, 1차에 15인 안팎이 간선되었다.홍문관에 결원이 생기면 홍문록(정부록·도당록) 중 3인을 뽑아 이조에서 주의(注擬)하면 왕이 그 중 1인을 낙점(落點)하여 결정하였다. 이 제도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사진은 명종실록으로 명종이 《홍문록》에 뽑힌 이들에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그 명단에 든 사람이 지제교를 하고 임금의 시종신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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