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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먼데는 싫다, 가까운 곳으로 하라! 경기를 본인 태실로 점지한 조선 성종

by taeshik.kim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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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성종태실 및 태실비
 

창경궁 성종태실 및 태실비

성종태실 및 태실비 King Seongiong's taesil (Placenta Chamber) and taesilbi (Placenta Burial Marker) 成宗胎室輿胎室碑 태실은 왕실 자손의 태를 문어 기념했던 조형물이며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historylibrary.net

 

앞서 창경궁으로 옮긴 성종대왕태실成宗大王胎室을 간략히 사진 중심으로 소개했거니와, 이 자리에서는 이 문제를 들여다 봐야겠기에 별도 코너 하나로 독립한다. 

태실은 실상 동시대 무덤을 조성하는 방법과 근간이 같아서 나를 이런 같은 근간을 매양 그랜드디자인 grand design이라 부르거니와, 무덤 뿐이겠는가? 사리장엄 안치하는 방식도 이와 똑같다. 

태실은 글자 그대로 태胎를 묻은 무덤이라, 다만 부처님 산소인 탑파나 실제 사람이 죽어서 가는 영원의 집 무덤과는 생生과 死의 갈림길이 있기는 하나, 태 역시 일단 生에서 불리한 死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뿌리가 같다. 




무덤 앞에 그 내력을 정리한 기념물인 비갈碑碣을 세우듯이, 태실은 왕이라면 모름지기 그 내력을 그런 식으로 새겨 놓았으니, 이 성종대왕태실 또한 마찬가지라, 그 앞쪽에다가 비석 하나를 세웠다. 

이 비석을 보면 전면에 성종대왕태실成宗大王胎室이라 큼지막한 글씨로 쓰고, 그 뒷면에다가 이 태실이 유전流轉한 역사를 아주 간략히 정리했으니 다음과 같다. 




 
성화成化 7년(1471) 윤 9월 日 立
만력萬曆 6년(1578) 5월 日 改立
순치順治 9년(1652) 10월 日 改立
도광道光 3년(1823) 5월 日 改立
 

마지막 문구로 보아 이 태실비는 아마도 도광 3년에 그 태실을 고치면서 세운 듯하다. 하긴 그 앞면에 성종이 죽고 나서 받은 시호인 성종成宗이라 한 것으로 봐도, 이 기념비는 성종 사후에 세운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성종은 1457년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469년 13세로 즉위했다. 따라서 이 태실은 적어도 저 기록으로 보아 그가 왕이 되고 나서 3년째 되는 해에 만들었음을 본다. 

나아가 저 기록을 통해 태실은 끊임없이 후대에 개보수했음이 드러난다. 이는 태실이 조선왕조에서는 종묘사직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태실을 관리하는 업무는 이 단계에서 내가 자료를 참조하지 않아 자신은 없으나(이 분야 전업 연구로 울진국 학예연구사 심현용 박사에 의한 의욕적인 연구가 있다. 다만, 나는 아직 그 책을 정독하지 못했다는 말을 해 둔다.) 틀림없이 이를 관장하는 중앙 관부官府가 있었을 것이로대, 그 중앙 관부 지휘에 따라 담당 지방정부가 실무를 했으리라 본다. 




세조 3년(1457) 세조 장남인 덕종과 그 정비 소혜왕후 사이의 차남으로 경복궁 자선당에서 출생한 자을산군, 곧 훗날 성종은 예종이 일찍 죽가 13살에 엎혀서 조선왕조 제9대 국왕이 된다.

재위 기간이 25년에 달하지만, 죽을 때 38세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왕은 노릇할 자리가 못 된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거의 다 단명했다.

다른 글들을 검출하니, 그의 태는 애초에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1(옛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율리)에 1458년 3월 1일 묻었다. 이 태를 묻는 일을 장태藏胎 혹은 안태安胎 등으로 표현한다. 지금의 지도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네이버 지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1

map.naver.com

 

하지만 성종 11년(1480) 저 일대가 청주한씨 사패지賜牌地가 되면서 곤란해졌다. 청주한씨로 당대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한명회다. 신하한테 왕실이 내린 땅이 되면서, 왕이 자기 태를 다른 데로 옮기는 일이 생기게 됐다. 뭐 별로 맘에 안들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그의 태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구 광주군 경안면 태전리) 265-4번지 태봉산으로 간다. 태봉산이란 이름은 이때 얻었다.

이 태전동을 한자로는 胎田洞이라 쓰는데, 바로 임금의 태를 묻은 동네라는 뜻이니, 지금의 동네 이름 내력은 성종에서 말미암았으니 재미 있지 아니한가? 


네이버 지도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 265-4

map.naver.com

 

그러다가 이왕직李王職 방침에 따라 대부분의 조선왕 태실이 1928년 태호와 태지석을 포함한 알맹이들만 쏙 빼서 서삼릉으로 이봉移封하게 되며, 성종 태실 역시 이를 피하지 못했다.

다만 당시 이봉은 알맹이만 빼내오는 것이었으므로 태봉산 정상에는 석물들이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2년 뒤인 1930년 5월 무렵 이왕직이 지금의 창경궁 양화당 동북쪽 구릉지로 이전한다. 창경궁에 이왕직박물관이 있었으므로 아마 야외전시물로 생각하지 않았나 한다. 




지금은 내가 더는 여유가 없어 조사를 미루지만, 저 태실비 기록과 다른 증언은 교차검증을 기다려 봐야 한다. 

다만 실록에는 성종 7년(1476) 11월 28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검출되는데, 본인 태를 묻을 장소로 경기도를 지목함을 본다. 


전교傳敎하기를,

"종전에 안태安胎는 모두 하삼도下三道에다 하였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풍수학風水學)〈관원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하다."

하니, 풍수학 〈관원이〉 아뢰기를,

"멀고 가까운 것을 논할 것 없이 길지吉地를 얻기를 기할 뿐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일반 사람은 반드시 모두들 가산家山에다가 태胎를 묻는데, 근래에는 나라에서 땅을 가리는 것이 비록 정결精潔하기는 하나, 대길大吉한 응험應驗이 없으니, 풍수風水의 설은 허탄虛誕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으니, 그 〈안태安胎할〉 만한 땅을 경기京畿에서 고르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7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9책 396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국왕(國王)


이로 보아 성종 이전 왕의 태실은 하삼도, 곧 충청 전라 경상도에 두었음을 안다.

그곳은 왕화王化가 직접 미치기 힘든 곳이라, 저 대화는 왕화를 펼치는 수단으로 태실이 활용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다시 말해 태실의 설치는 곧 그곳이 조선왕조의 직접 지배가 관철하는 상징이었던 셈이다.

이는 성종 시대가 되면 이미 조선왕조 직접 지배가 전국토에 걸쳐 안정화 단계에 들어갔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는 곧 태실의 기능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음을 의미한다.

***

성종의 태실이 처음에 성남 율동에 조성되었다는 연구는 잘못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광주 태전동에 설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심현용 선생 지적. 내가 직접 확인을 못한 불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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