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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몽촌이 구축한 헛다리 백제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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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고학, 특히 한성백제 고고학 편년은 80년대 몽촌토성 발굴성과를 토대로 삼는다. 

하지만 사정이 일변해 90년대 이래 풍납토성이 발굴됨으로써, 또 이에서 몽촌토성이 기존에 커버할 수 없는 문화층이, 그것도 다양하게 출현함으로써 사정이 일변해 몽촌으로 한성백제고고학을 논할 수는 없게 되었다.

문화층이라 하지만, 80년대 몽촌토성 발굴은 문화층 개념이 없다.

있다고? 있는지 봐라 없다. 

그 발굴보고서 어디를 뒤져봐도, 또 나중에 최종택이 그에서 고구려 토기를 골라냈다 대서특필하나 미안하지만, 그렇게 골라낸 고구려토기가 몽촌 어느 문화층에서 어찌 출현했는지를 알려주는 보고서 기술 한 단 줄도 없다. 

그냥 팠을 뿐이고, 그냥 끄집어 내서 그냥 기종에 따라 분류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고구려토기는 적어도 보고서 기술을 존중할 때는 백제랑 같은 층위에서 같이 섞여서 출현했을 뿐이다.  

풍납토성이 발굴된 이후에도 여직 몽촌에 기대어 기존 주장을 묵수하는 고고학도 일군이 있다. 

몽촌을 팠다. 다시 팠다. 80년대 대학생들이 판 구덩이까지 다시 팠다. 
 

80년대 발굴하고 그 주거지라 해서 노출해 놓은 현장.

 

놀랍게도 파 보니 80년대 몽촌은 파다가 말았다. 보니 표토에서 2미터 걷어내고 덮어 버렸다. 그래서 그때 왜 이랬냐고 그때 발굴한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물이 나와서라고 한다.

근자에 다시 파니 그 밑으로 2~3미터는 백제문화층이 더 내려간다. 

이걸로 한성백제고고학을 썼다!!! 

표토 2미터 걷어내고 그것이 백제 전부인양 썼다.

몽촌토성 성벽 초축 연대는 성벽에서 출토되었다는 시유도기 쪼가리 하나로 동진시대에 맞추었다. 그리하여 몽촌은 3세기 중후반에 만들었고, 이때가 백제가 실질적인 영역국가로 등장했다는 고고학 신화가 만들어졌다.

왜? 식민지시대 한국사를 개척한 일본 친구 문헌사학도가 다 그리 말했고, 해방 이후 이병도 이기백까라 모조리 그 골자를 따라 아주 미세하게 그 연대를 올렸지만, 피장파장 얼개는 같다.

시유도기 쪼가리 동진설은 그렇게 해서 고고학이 문헌사학에 갖다 바친 조공품이다. 

한데 그 쪼가리 출토 상황은 보고서에도 없다. 그냥 여기서 나왔다는 전언만이 덩그러니, 그것도 해당 연도 발굴보고서가 아니라, 그 다음 몽촌 발굴보고서에 꼴랑 보일 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것이 출토된 정황이 맞다고 해도, 도대체 그것을 근거로 3세기 중후반이라는 근거가 되는 논리 자체를 나처럼 아타마가 총명하기 짝이 없는 자는 도통 이해를 못하겠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런 옛날 것이 맞다고 강짜를 부리니 

아! 

무령왕릉 졸속 발굴은 전설속 이야기가 아니며 현재진행형임이 분명하다.

몽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내가 말한 이 대목을 빼면 앙코빠진 찐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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