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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과 쌍릉 사이, 백제 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 일신한 치석治石 기술, 전대미문하는 무덤 집을 만들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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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해서 하루아침에 없던 기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전축분을 이식·습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이 부족한지는 분명히 드러났다.

그 이전 우리는 명색이 치석治石이라 하지만 구석기 시대 그 기술을 벗어나지 아니해서 가공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돌맹이를 주어다가 새로 쌓았을 뿐이니 그건 치석이 아니라 실은 재배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문제는 바로 이거다. 말 그대로 돌을 가공하자! 이 정도는 공정이 하나 더 늘고 공사 단가가 높아지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차피 우리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우리 가치를 스스로 높이는 것이기에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해서 어느 순간 백제 엔지니어들이 돌을 가공하기 시작했다.
 

쌍릉 중 대왕릉

 
 
돌덩이는 애초 쓰임새를 염두에 두고 잘라내고, 그것은 다시금 송판 만드는 기술을 적용해 판형으로 만들고 그라인딩 기술을 도입해 표면도 싹싹 문질러 기름칠한 것처럼 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이참에 묵구조 기술도 개혁해 옹이 정도만 치고 대강 잘라 올리던 기둥과 서까래 들보 또한 마찬가지로 톱질 샌드페이퍼질 확실히 하고 단청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래 중국에 가서 보니 이런 기술은 어렵지도 않은 것을 우리는 방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령왕릉이 촉발한 좌절과 분노, 그리고 각성에서 비롯한 백제 장인의 숨결이 빚은 교향곡이 부여 능산리에 포진한 사비시대 백제 왕릉들과 익산 쌍릉이다.

두 지역 왕릉 혹은 왕릉급 고분은 식민지시대에 속내를 드러낸 이래 오랫동안 지하에 잠겼다가 근자 재발굴조사를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렇게 드러난 속살이 폭로한 백제 돌방무덤은 한성시대 이래 면면히 내려오는 종래 백제 돌방무덤과는 완전히 결을 달리한 업그레이드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 돌방 만들기에 쓰인 석재들이 우뚝하게 증명하니, 그 석재는 종래 백제에서는 볼 수 없던 판형이고 모조리 판에 찍어낸 떡 같고 표면은 지극한 정성을 가미해 잘디잘게 갈았다.

현재까지 우리한테 주어진 고고학 자료들에 의하면 백제가 이러한 치석기술로 접어든 시점은 사비시대가 개막하고서다.

 

쌍릉 중 대왕릉

 
그 기술 변환 혹은 기술혁명은 우연인가? 나는 그것이 무령왕릉이 필두로 하는 전축분이라는 외부 충격이 직접 타격이었다고 본다.

무령왕릉이 없었던들, 그것이 중국식 전축분이 아니었던들, 백제는 660년 멸망 직전까지 한성기 이래 그 클리쉐한 돌방무덤으로 만족하고 말았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무령왕릉이 필두하는 전축분 도입은 백제, 더 좁히면 백제 엔지니어들한테는 존재가치까지도 의심케 한 일대 문화충격이었다.

이제 우리는 더는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은 백제를 혁신으로 몰아넣었다. 그 혁신은 무덤 자체를 변화케 했으니, 이러한 각성에 기반하고서 선보이기 시작한 그 새로운 돌방무덤, 곧 쌍릉 같은 무덤을 통해 비로소 전축분에 견줄 만한 새로운 돌방무덤을 만드는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이런 기술 혁신은 무덤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 혁신은 귀신 집을 박차고 나와 우리가 아는 화려한 백제 건축술과 공예술로 발현했으니, 이로써 보건대 무령왕릉은 한반도가 새로운 시대에 돌입했음을 알린 위대한 팡파르였다. 

 

쌍릉 중 소왕릉

이제 마무리를 하는 시점에 다시금 서두로 돌아가 이른바 창왕명 석조 사리감의 그 감실龕室이 우체통 혹은 궁륭형 혹은 아치형 혹은 터널형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탑은 내가 늘 주장하듯이 부처님 시신을 안치한 무덤이다. 그 시신은 사리舍利로 발현하며, 그 사리를 안치하는 사리장엄은 관곽棺槨이며, 그것을 안치하는 굴 감실은 무덤방이다. 그것은 산소山所이기에, 무덤이기에 동시대 무덤 양식을 따를 수밖에 없다. 탑은 언제나 무덤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언제나 저런 사리장치 혹은 사리장엄은 언제나 고고학과 동떨어져 미술사, 더욱 좁게는 불교미술사, 혹은 공예사 영역을 맴돌 뿐이다. 그것은 고고학도 아니며 미술사도 아니며 불교미술사도 아니며 공예사도 아니며 그것을 총합한 사상사다.

고고학으로 보면 탑은 고분이라는 관점에 접근해야 비로소 고고학이 된다. 나아가 그것은 불교 사상사이면서 그 시대 사상사 자체가 되는 것이다. 

저 감실이 왜 궁륭형인가? 무령왕릉을 알아야 하며, 그 무령왕릉은 전형적인 중국식 전축분임을 알아야 비로소 그 의문을 해명한다. 저 창왕명 석조 사리감의 감실은 그 자체가 무덤이다. 그 무덤은 전축분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전축분에서 발현해 백제 장인들이 스스로 혁신해서 그 전축분 기술까지 흡수해 완전히 새로 만들어낸 업그레이드 버전 백제 돌방무덤, 곧 사비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그것이다.

 

쌍릉 중 소왕릉

 
사비기 이래 새로운 돌방무덤은 저 능산리 감실이 증명하듯, 또 쌍릉과 능산리 백제 왕릉들이 증명하듯, 실은 무령왕릉이 도입한 중국식 전축분에 격발해 백제 장인들이 혁명해 만들어낸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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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과 쌍릉 사이, 백제 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 협잡과 혁신, 위기의 양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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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축분 도입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백제 장인들한테는 일대 위기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이런 좌절 분노을 딛고서 막상 모습을 드러낸 그 전축분 왕릉이었다. 어랏? 우리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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