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동아시아권 군주, 특히 중국의 경우 대권을 잡으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일 중 하나가 자기가 죽어서 살 집, 곧 제 무덤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렇게 생전에 미리 만든 왕릉을 수릉壽陵이라 한다.
이런 전통이 한반도 문화권에서는 어떻게 발현되는지 모호한 측면들이 있다. 죽을 때를 대비해 미리 만든 무덤은 그 죽을 시점에 무덤 문을 따고 들어가야 하는데, 신라의 경우 중고기 이전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으니, 경주분지를 장식하는 저 거대한 무덤들은 적석목곽분이라 해서, 개중 몇 기를 발굴하기는 했지만, 수릉 흔적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따고 들어가 시신을 나중에 안치하기 위한 시설은 아무래도 적석목곽분은 구조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으며, 그런 전통은 중고기를 지나 이른바 돌방무덤이 도입되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백제는 일찍이 외부에서 통하는 문이 있는 돌방무덤을 한성기에 벌써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문이 있는 무덤은 효율성이 높아 무엇보다 부부 합장묘 혹은 가족 합장묘를 가능케 한다. 무덤 하나를 만들어 놓고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을 그 무덤방에 안치하니 얼마나 토지효율성이 높겠는가?
이런 효율성은 벽돌무덤 역시 아주 좋아서, 외부에서 무덤방으로 통하는 문이 없는 벽돌무덤은 거의 없다고 안다. 간단히 말해 돌방무덤이건 벽돌무덤이건 생전에 무덤을 미리 만들어 대비한다는 특징이 있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내 선친도 본래는 따로 당신이 돌아가셔서 잠들 무덤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 규모가 작아서 임시 봉분만 만들어 놓는 수준이었지만, 수릉의 전통이 근자 한국사회까지 전승됐음을 보여주는 보기로 들어두고자 한다.
무령왕과 그 왕비 역시 지금의 그 왕릉이 수릉인지 여부는 단안하기는 힘들다. 그에서 발견된 이른바 매지권買地券(나는 묘권墓券이라 부른다)에 의하면, 무령왕은 525년에 죽어, 3년 뒤에 지금의 무덤에 시신이 안치됐다가 3년 뒤인 526년에는 그 왕비 또한 죽어 3년 뒤에 남편 무덤에 합장되었다.
여기서 이른바 빈殯이라 해서 죽어 묻히기까지 그 3년 동안(3년이라 하지만 실제는 25개월 혹은 27개월이다) 저들의 시신을 모신 빈소는 어디였는가 하는 논란이 있겠지만(나는 그 빈소 또한 지금의 무덤이라 본다.) 나는 저 무덤이 수릉이라고 일단 본다.
수릉이라면, 무령왕이 즉위하고 난 어느 시점에 이미 자기 무덤을 만들려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했다 하겠지만, 아니라면, 죽고 나서 빈소에 시신을 안치한 그 기간에 기술자들을 동원해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수릉이건 아니건 지금은 그 문제는 치지도외한다.
지금 내 온통 관심은 수릉인가 여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시선은 백제 엔지니어들을 향한다.
왜 엔지니어이며, 그들을 왜 우리는 주목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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