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축분 도입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백제 장인들한테는 일대 위기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이런 좌절 분노을 딛고서 막상 모습을 드러낸 그 전축분 왕릉이었다.
어랏? 우리가 그렇게 전축분은 안 된다고 그렇게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막상 완공에 즈음해 드러낸 그 모습을 보고는 또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들한테는 주마등처럼 그네들이 이 전축분 이전에 그네들이 만든 다른 왕릉과 오버랩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모습을 드러낸 그 벽돌집 왕릉은 누가 봐도 그네들이 지금껏 만든 그것과는 도대체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뽀대가 났다. 우리가 봐도 폼이 나기는 하네, 이런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랬다. 겉으로는 중국 놈들이라 해서 별 다를 것도 없다 했지만, 그네들 무덤 만드는 기술은 분명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다. 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좌절을 우리는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위기를 백제 엔지니어들은 어떤 방식으로 타개하려 했을까. 그네들한테 고민은 언제건 이런 일이 재발할 가능성이 잠복한다는 사실이었다. 실제 무령왕릉 딱 한 군데로 그칠 듯 하던 실험이 다른 무덤에도 속속 침투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러다 우리는 영영 도태되고 말리라는 위험신호가 본격으로 엄습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벌어졌고 우리는 일단 압도적인 저 신기술에 서전에서 패배했다. 그것도 대패였다. 고비를 어찌 타개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대증요법으로 저 꼴 뵈기 싫은 중국 놈들은 어떻게든 이 땅에서 몰아내야 했다. 이를 위해 그 꼬투리를 잡아야 했다. 감시망을 돌리니 그래 어떤 떼놈 기술자가 간밤에 여념 집에 들어가 여성을 겁탈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들려왔고 벽돌 만드는 공장에서 그 관리자들이 노무자들을 혹사케 하고 구타한 일도 있었다 한다.
이런 일들은 소문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그럴 듯한 사실로 포장해 끊임없이 여러 경로를 거쳐 조정으로 들쑤셔 넣었으니 이는 결국 백제에 전축분은 안 된다는 여론을 환기하고자 함이었다.
그런 공작들이 이제 서서히 빛을 보는가 하는 그때, 두 가지 정국 변화가 있었으니, 하나는 도읍을 사비로 옮긴다 해서 백제 엔지니어 시대들한테는 새로운 시장이 열렸고, 그런가 싶더니 이내 신도시 개창으로 정신이 없을 그 무렵 저 바다 건너편에서 뜻하지도 않은 희소식이 들려왔다.
백제를 그렇게 특별대접하며 심지어 왕릉조차 그네들 기술자를 파견해 만들어주던 양 무제武帝 소연이 후경이라는 신하가 일으킨 군사쿠데타로 실각하고 유폐되었다는 소식이 호외로 날아든 것이다.
이 소식에 놀란 중국 기술자들이 가족 안위가 걱정된다며 서둘러 짐을 싸고는 귀국길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막 송산리 29호분과 교촌리고분 축조에 동원되어 그 공사가 딱 중간을 지나던 시점이었다.
그들이 떠나자 그들이 바닥과 벽체는 벽돌로 쌓아 놓은 무덤은 비로소 절치부심하던 백제 장인들 차지가 되었으니, 그것을 넘겨받은 그네들은 쏵 바닥까지 다 갈아 엎고 싶었지만 공사비 문제로 단념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이 남긴 그 벽체 위에다가 그네한테 익숙한 그 기술, 곧 돌쌓기를 이어 붙여 무덤을 완공한 것이다.
중국 기술자들이 떠나고 그네가 남긴 벽돌무덤이 남긴 잔흔이 여전하던 시절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 백제 장인들, 특히 무덤 만들기와 그 핵심 기술인 치석治石 전문가들이 전국 심포지엄을 열었으니 대회 주제 백제 치석기술의 회고와 전망이었다.
기조발제는 백제 치석 장인 기예능 보유자인 아비지라는 사람이 했으니 이 자리서 그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우리가 그간 너무 방심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란 그럴 듯한 구호에 안주했다.
안주는 퇴보였고 퇴보는 신기술이 이 땅에 착근하는 빌미가 되었다. 무령왕릉 참사는 언제건 재발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분발하며 우리 스스로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누라 자식 빼곤 다 바꾸자. 나부터 바꾸겠다.
이를 두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으니, 뭐 이것이다 하는 결론을 도출한 것은 아니지만, 전축분이라는 새로운 기술 도입은 백제 정신의 포기이며, 중국에 대한 종속을 가속하니 안 되며, 따라서 기존 우리가 안주한 치석 기술을 혁신해야 한다는 데는 대체적인 합의가 이뤄진 채 대회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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