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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무령왕릉과 쌍릉 사이, 백제 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 전대미문前代未聞, 하지만 국경을 벗어나면 유행이 되고

by taeshik.kim 202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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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에서 새로움은 어떤 경로를 통해 등장하는가? 그 새로움은 일시로 끝날 수도 있고 장기 지속할 수도 있다. 이 새로움이 어느 정도 지지세를 확보하면 그것을 우리는 ‘유행’이라 부를 수 있겠으며, 그런 유행이 어느 정도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면 ‘전통’이라 부를 수 있겠다. 

무덤이란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정의하면 ‘죽은 사람이 사는 집’이다. 이 집은 여타 다른 부문이 그런 것처럼, 산 사람이 사는 집이 그런 것처럼 시대별 유행 또한 아주 민감하다. 다만, 그 죽은 사람의 집이 변화하는 양상이 어떠한지를 견주려면, 비교 대상을 어떤 기준에 따라 범위를 좁혀야 한다. 그래야 비교의 의미가 있다.

같은 집이라 해서 오직 집이라는 이유로 아파트와 초가를 견줄 수 있겠는가? 물론 집이라는 전체 범위를 논할 적에 아파트와 초가는 비교 의미가 있다. 

 

1920년대 서울 삼청동 일대 풍광이다. 집이란 무엇인가? 무덤이란 무엇인가?

 
오늘 우리는 그 기준을 왕릉 혹은 왕릉임이 확실한 최고 지배층 무덤으로 국한하려 한다. 시공간은 백제로 잡는다. 이 점에서 백제는 의미가 커서 우선 그 왕국이 존속한 시간이 아주 길어 700년을 헤아리며, 더불어 크게 보아 수도를 세 번 옮겨 그에 따른 지역색도 드러난다.

이것도 세부로 들어가면 복잡하겠지만, 또 개중에서도 한성도읍기가 아주 길어 장장 500년에 달하므로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한성기 중·후기 이래(솔까 그 전반기 최고지배층 무덤 양상이 어떤지는 현재로서는 파악이 매우 곤란하다.) 대략 60년에 이르는 웅진도읍기, 그리고 120년 정도를 헤아리는 사비도읍기 양상을 아주 거칠게 비교하면 그 변화한 양상이 아주 뚜렷하다. 

즉, 한성기에는 이른바 적석총積石塚이라 해서 계단식 돌무지 방단 무덤이었다가, 웅진기에는 돌방 혹은 벽돌무덤을 거쳐 사비기 돌방무덤에서 종말을 고한다. 물론 세부로 따지면 같은 돌방무덤이라 해서 명칭이 그렇지 세부로 들어가면 왕청난 차이를 빚어 웅진기 그것과 사비기 그것은 전연 계통을 달리한다.

전자가 무덤방이 궁륭형 혹은 아치형이며 강돌이나 깬돌을 쌓아올린 데 견주어 후자는 각이 착착 진 갈아 만든 판돌로 만든 상자형이다.

 

석촌동 고분군. 저랬다고 복원은 해놨는데 솔까 저랬는지 아닌지 모른다.

 
무덤을 두고 흔히 유행에 둔감해 그 변화가 더디다는 통설이 한때 고고학이라는 학문에 자리를 잡았지만, 천만의 말씀 콩떡이라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이 새로운 유행의 등장을 전대미문前代未聞이라 한다. 이 전대에는 미문한 이 새로운 흐름은 내가 볼 적에는 크게 등장 경로로 보아 크게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내재적 창안이라 해서 그 내부 구성원 누군가가 새로움을 시도하겠다 해서 그것이 등장하는가 하면, 둘째 외부 충격이 있어 그 사회가 교유한 외부에서 수입한 경우가 있다. 다만 새로운 경향은 이 둘로 딱 갈라지지는 아니해서 일정 시점에는 두 흐름이 융합하는 방향으로 간다.

작금 한국이 세계를 주름잡은 상품 중 하나인 이른바 K-pop이 딱 이에 해당해서, 그 유래 혹은 뿌리는 미국 대중문화가 대표하는 수입산이지만,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내적 변화를 가미해 새로운 모습으로 세계를 향해 발신 중이다. 

 

K-pop 국적은 어디인가? 한국인가? 미국인가? 아님 그것을 다 뛰어넘는 무엇인가?

 
이런 점에서 한성도읍기 중후기 왕릉임이 확실한 석촌동 일대 적석총은 그것이 백제의 창안이거나, 그것이 아니라 해도 많은 지적이 있듯이 고구려의 그것과 일정한 교유에서 유래한 수입산 특징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웅진기를 잠깐 수놓은 벽돌무덤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양상을 볼 적에 이 벽돌무덤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동시대 중국, 특히 장강 유역 남조 문화권을 직접 뿌리로 하는 수입산임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변함이 없거니와, 현재까지 확인된 곳으로는 같은 송산리 고분군 인접 지점 중에서도 삼각편대를 이루는 구역에 포진하는 무령왕릉과 송산리6호분, 그리고 지금은 그 지하에 박힌 송산리 29호분, 그리고 근자 재발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교촌리고분 정도가 알려졌다.

그 세부로 들어가면 전자 둘이 전체 무덤 구조가 벽돌인데 견주어 나머지는 바닥이나 벽체 정도만 벽돌로 하고, 지붕은 돌덩이를 얹었다는 점이 차이를 보인다. 

 

식민지시대에 모습을 드러낸 공주 교촌리3호분. 이 친구 나중에 할 말이 있겠지만, 묘하다. 바닥과 관상棺床, 그리고 무덤 마감재는 벽돌로 쓰고 그 나머지는 돌덩이를 갖다 놨다.

 
이 벽돌무덤이 백제 사회 내부로 국한할 때는 전대미문이다. 벽돌로 무덤을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그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대미문은 시간과 공간을 넓혀 당시 백제가 교유한 국제사회로 나아가면 사정이 전연 달라, 특히 중국에서는 그 이전부터 패턴이었고, 백제가 저걸 만들던 그 시절에도 그랬다.

당시 국제흐름에서는 패턴 혹은 유행이지만, 백제 사회 내부에서는 전대미문하는 돌발이요 혁명이었을 이 사건, 곧 벽돌무덤 도입은 무엇이 추동했을까?

아니, 나한테 관심은 그것을 가능케 한 힘보다는 그것이 남긴 흔적이다. 이 의문을 해명하려 할 적에 우리가 유의할 점은 백제로서는 벽돌무덤 시도가 대단히 일시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 벽돌무덤은 웅진도읍기 어느 시점에 잠깐 유행하다가 사라지고 만다. 더는 벽돌로 무덤을 쓰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벽돌무덤은 그렇게 단 한 순간 희미한 족적을 남기고는 그렇게 맥없이 사라졌을까?

이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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