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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한달만에 해치운 한양도성 축성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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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世宗實錄》 148권, 지리지地理志 경도한성부京都漢城府 한 대목이거와, 현재 우리가 서울도성 혹은 한양도성이라 일컫는 그 거대한 공사 축성 과정을 집약 정리한 것이다. 번역은 문맥을 부드럽게 하는 수준에서 내가 손을 조금 봤다.  


도성都城은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르는 지름이 4천3백86보가 된다.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곧 동소문東小門】,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곧 수구문水口門】,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곧 남대문】,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곧 서소문西小門】,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한다. 【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 민정民丁 11만8천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했으니, 정월15일에 역사를 시작해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7백59명이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9천4백31명을 모아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해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했다. 금상今上(세종을 말함-인용자) 4년 임인에 (상왕인)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니, 8도 군사 총 32만2천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해 2월에 마쳤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셋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일을 없애고자 두 문을 더 만들었다.】 


都城周回九千九百七十五步。 北自白嶽祠, 南至木覓祠, 徑六千六十三步。 東自興仁, 西至敦義門, 徑四千三百八十六步。 正東曰興仁門, 正西曰敦義門, 正北曰肅淸門, 東北曰弘化門, 【卽東小門】 東南曰光熙門, 【卽水口門】 西南曰崇禮門, 小北曰昭德門, 【卽西小門】 西北曰彰義門。 【我太祖五年丙子春, 徵各道民丁一萬八千七十六, 始築都城, 以正月十五日起役, 至二月晦日罷役。 燔瓦及石灰軍, 又一千七百五十九。 至秋, 又徵民丁七萬九千四百三十一, 以八月十三日始役, 至九月晦日罷役。 今上四年壬寅, 太宗命修築之, 其土城, 皆易以石。 徵八道軍摠三十二萬二千四百名, 以正月十五日始役, 二月而畢。 城東初開水門三, 每遇霖潦, 或致壅遏, 故增作二門。】 




나는 누누이 말했다. 옛날 사람들이 전통 방식으로 무엇을 만들었다 해서, 그것이 유별나게 더 튼튼한 것도 아니며, 그것은 부실투성이였고, 자재 빼돌리는 일도 빈번했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쌓아 남은 것들이 유별나게 건축술이 뛰어나서 남은 것도 아니요, 순전히 운빨이었노라고 말이다. 어찌하다 보니, 용케 운이 좋아 그렇게 살아남았을 뿐이다. 


전통시대 공역功役은 전광석화 같은 속도전이 관건이었다. 아주 짧은 기간에, 그것도 농번기를 피해 순식간에 해치워야 했다. 


이 원칙에 따라, 현재 남은 성곽을 기준으로 대략 둘레 18.6킬로미터에 이른다는 한양도성은 대략 한달만에 해치웠다. 


물론 저 기록에 보이는 공정은 대체로 실제 성을 쌓기 시작해 그것을 마친 시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그에 소요되는 장비 재료 조달은 별도 공정이 필요했으니, 이것까지 합치면 그 공기는 조금 늘어나겠지만, 이조차 생각보다 얼마되지 않아, 이 역시 전광석화 속도전이었다. 




속도전을 감행하는 까닭은 전쟁의 그것과 아주 근본이 같다. 오래도록 군사를 징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럴수록 불만은 팽배해지기 마련이라, 더불어 그에 투입되는 예산은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전쟁 역시 속도전으로 결판을 내야했듯이, 대규모 공사 역시 마찬기지라 순식간에 해치우는 것이 관건 중의 관건이었다. 


그럼에도 전통시대 공사는 나무를 벌채하고 말리는 데만 10년을 투자하면서 그늘에서 말리는가 하면 바닷물에 오래도록 담가서 송진을 다 뺐다는 말이 횡행한다. 


도대체 이런 밑도끝도 없는 낭설을 내뱉는 자 누구인지 그 놈은 붙잡아다가 증거가 어디있냐 윽박하고만 싶다.  


저런 믿음은 결국 작금 문화재 현장을 왜곡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니와, 

틈만 나면, 우리 조상은 안 그랬는데, 우리가 관리를 잘못해서 문화재가 이 모양이 되었다는 낭설의 절대 근거가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문화재 현장마다 나타나서는 짐짓 전문가연하면서, 혹은 그 문화재 정의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저 따위 낭설을 펴는 자가 한둘이 아니다. 문화재 시민운동을 자처하는 자 중에도 이런 낭설을 펴는 자가 적지 않다. 





우리 조상은 안 그랬다고, 우리 조상은 언제나 무결점이었고, 그들은 언제나 건축천재였다는 낭설이 판을 친다. 


덧붙이건대, 자칭 고고학도라는 전문가를 자칭하면서, 서울 풍납토성을 바라보면서, 저 거대한 토성을 쌓는데 연인원 몇 만명이 몇십년에 걸쳐 완공했다는 논문이 나오는 지경이다. 이 자는 고고학을 조금 알지 모르나 역사는 전연 모르는 자다. 


풍납토성 쌓는 데 무슨 몇 년이 걸린다는 말인가? 한두달 만에 후딱 해치운 것이 풍납토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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