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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무속계의 BTS 김금화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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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무당 김금화씨가 지난 23일 오전 5시 57분 향년 88세로 타계했으니, 이 소식을 나는 고인과 친분이 많았던 국립민속박물관 어느 선생한테서 듣고는 문화재 담당 박상현 기자한테 연락을 취했더니, 우리 공장 인천본부에서 이미 기사가 나갔단다. 그러면서 박 기자 왈, "인천본부 기사에 덧붙여 종합기사 하나 쓰겠다"고 했으니, 그것이 아래 우리 공장 기사라. 


하늘로 떠난 큰무당…배연신굿 보유자 김금화 별세(종합)


이에서 김금화가 차지하는 위상을 잘 정리했다고 본다. 따라서 자칫 췌언일 수도 있는 두어 마디, 이런저런 곳에서 주어들은 말들을 버무리는 수준에서 그의 장송을 나 나름으로는 대신하고자 한다. 


김금화 큰무당



무형문화재 업계에서, 특히 무속계에서 김금화라는 이름은 그 대명사와도 같지만, 어찌된 셈인지 나는 고인과 이렇다 할 직접 인연이 거의 없다. 한두 번 마주치며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었던 듯하지만, 그 뚜렷한 인상이 남지 않음을 보면 그 만남이 특별하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다만 참 곱게 늙은 할매라는 인상 정도는 있다. 


저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김금화는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굿이 미신으로 인식되면서 멸시와 비판의 대상이" 된 무속을 당당히 문화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데서 찾아야 한다. 비단 박정희 시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해도, 무속은 어쩌면 인류 역사 이래 내내 타도와 멸시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혹자는 신라 제2대 왕 남해차차웅의 '차차웅'이 무당을 이르는 신라말이라는 김대문의 증언을 들어, 그 무렵엔 무당이 존중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여하튼 우리한테 기록으로 주어진 흔적을 추적하는 한, 이른바 푸닥거리 무당은 시종 멸시의 대상이었다. 


김금화는 수천년, 혹은 적어도 조선시대 이래 적어도 500년 이상 시종 핍박받는 무속 혹은 무교를 일거에 뒤집어, 당당한 문화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니, 무속에서 그의 위상은 불교의 성철 스님,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 개신교의 한경직 목사에 버금하는 별이었다. 


고 김금화



그렇다면 김금화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기사에서 언급한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미국 로스앤젤레스 녹스빌 국제박람회장 친선공연 '철무리굿'은 무속을 일거에 뒤집은 쾌거였다. 이를 통해 한국 무속이 천덕꾸러기에서 일거에 대한민국 문화상징으로 드라마틱한 변모를 겪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던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 하는데, 혹은 그것이 부끄럽다 하는데, 그런 것이 어떤 계기가 되어 외국, 특히 미국으로 나갔다가 거기에서 새롭게 재평가되면서, 이를 시발로 그런 움직임이 도로 국내로 치고 들어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는 일 말이다. 무속이 딱 그러했다. 


미국이 놀랍게 쳐다보니깐 우리가 뒤늦게 "미국이 높이 평가하네? 뭔가 있는 갑다" 하는 의식으로 극적인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이런 표현을 혹 비아냥으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인식 전환이 그렇게도 일어난다는 보기로써 하는 말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내가 나를 볼 수는 없는 법이다. 내 참모습은 나 아닌 타자들한테서 있는 것이다. 불교 연기론이 그렇지 아니한가? 저것이 있으므로써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는 법이며, 나 아닌 것들이 있어 나가 있고, 나가 있어 나 아닌 것들이 있는 것 아닌가? 이 타자성의 발견이야말로 인류 문명이 이룩한 가장 큰 자각이라는 말을 나는 어디선가 두어 번 한 기억이 있다. 


무속 역시 그렇게 재발견됐다. 그 재발견의 거대한 불꽃을 김금화가 터뜨린 것이니, 어찌 그가 한국 근현대사의 거인이 아니리오? 


미국에서 인정받았기에, 그리고 이를 고리로 해외에서 먼저 호평받았기에 그는 국제무대를 통해 한국 무속문화를 알리는 일을 자연스럽게 많이 하게 된다. 아마도 외국에는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 무속인일 것이니, 견주건대 김금화는 무속계의 방탄소년단(BTS)이다. 그에게는 신내림을 받은 독일 수양딸이 서너명 있는 이유도 이런 활발한 해외 활동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해외에서 얻은 명성은 그를 이내 중요민속문화재 보유자로 만들었으니, 그의 대내외적 위상은 이제 흔들림없는 보장을 받기에 이른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무속을 연희화했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김금화가 평가받아야 하는 대목 아닌가 한다. 물론 연희화가 무속 본연의 기능을 왜곡할 위험성은 논외로 친다 해도 말이다.  


억울한 원혼과 산 사람을 위로했을 그가 이승을 마감하고 저승길로 나섰다. 내일이 발인이라 하며, 49제에는 진혼제인지 하는 굿판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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