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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문맹률 70프로는 조선왕실과 일제의 합작품

by 초야잠필 2023.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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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현재 조선인 대부분은 교육도 제대로 못받은 문맹률 70프로 상태였다는 점을 말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1945년 당시 조선인들이 이 꼴로 해방을 맞게 된 것은 조선왕조와 일제의 합작품이었다 할 수 있다. 

한 예를 들어본다. 

앞서 일본 메이지 정부는 자국 근대화 과정에서 모자란 재원을 보충하고 빠른 속도로 서구식 교육제도를 완성하기 위해, 

가용한 전통시대 교육제도는 바닥을 박박 긁어서라도 이를 새 교육제도 만드는 데 써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막부의 중앙 교육기관인 학문소는 동경대학의 기원이 되었고,

번교는 지방 관립대의 기원이 되거나 중학, 고등학교등 지방 교육기관의 전신이 되었다. 

심지어는 전국적으로 수만 개가 있었다는 데라코야는 소학교로 전환하였다. 

이 때문에 메이지말에 이르면 소학에서 대학까지 연속된 교육제도가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조선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걸었다. 

한국이 문교 전통이 일본보다 적겠는가? 

과거제 천년 전통이 한국 문교의 위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 쇠침을 처음 박아버린 것은 고종과 대원군이었다. 
서원철폐로 한 나라 고등교육기관 전체를 날려버린 것이다. 

부호군(副護軍) 박규찬(朴奎燦)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난번의 이른바 동학(東學)은 국조(國朝) 이래로 없었던 괴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온 나라를 계속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니 이 교(敎)가 윤리를 파괴하고 강상(綱常)을 어지럽히는 것이 불교(佛敎)나 노자(老子)보다 심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유학(儒學)이 흥하면 이교(異敎)는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고 저 일종의 사악한 기운은 다스림을 기필(期必)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선현(先賢)들의 서원(書院)과 사당(祠堂)은 실로 성균관(成均館)을 모방한 것으로 본래 어진 선비를 존중하고 유학을 지키며 학문을 강론(講論)하는 곳인데, 지금 열에서 아홉은 허물어 버렸으니 선비들의 추세는 우매해 가고 풍속은 야박해져서 제사지내는 예식과 서로 사양하는 기풍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해조(該曹)에 하문(下問)하고 널리 공의(公議)를 모아 세워야 할 서원을 다시 세우고 팔도(八道)의 많은 선비들에게 포고하여 사문(斯文)을 일으켜 세운다면 비록 어리석은 일반 사람들이라도 다 공자(孔子)의 도를 외우고 본받을 줄 알고 전하의 은택을 읊으며 노래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묘당(廟堂)에 내려 보내 하문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나라에는 성균관이 있고 가정에는 글방이 있어서 유학(儒學)을 강론(講論)하고 있는데 어찌 장소가 없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지금 이 상소에서 청한 것은 경솔히 의논할 문제가 아니다."

하였다.


이는 서원이 없어져 교육할 곳이 없다는 상소에 고종이 비답하기를, 성균관이 있고 서당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답이다.

다시 말해서 서원훼철은 수천년 문교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초등교육기관과 최고학부의 허리역할을 할 교육기관을 통채로 들어내 없애버린 황당 무계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이 폭거로 후일, 조선의 근대화 때 고등교육기관으로 쓰였어야 할 서원이 이미 일본이 들어오기 전에 조선인들 스스로의 손으로 작살이 났다.

그 다음-.

위 상소 비답에서 고종이 "성균관과 서당이 있는데 뭔 걱정이냐"라고 했던 바로 그 성균관과 서당-.

1910년 이후 성균관은 근대교육기관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총독부에 의해 경학소로 격하되어 최고학부의 위치를 상실해 버렸고, 

서당은 소학교로 전환하기는커녕 총독부에 의해 불법화해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조선왕조와 총독부의 합작품 결과가 바로 기존 교육질서의 철저한 해체와 단절이었고,

그리고 그 잿더미 속에서 재건된 것은, 

조선인들에게 고등 교육을 허용하지 않는 식민지 교육의 건설이었다는 말이다. 

그 결과? 

그것이 바로 1945년 당시 문맹률 70프로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지 않았으면 성균관은 서울대의 전신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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