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 번은 도쿠가와 막부 삼백년 동안 항상 목에 칼을 대고 살았다고 해도 좋다.
항상 긴장해 있었고 항상 도쿠가와 칼끝은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번은 번사藩士(번의 무사) 양성에 전력했고 이는 비슷한 처지의 조슈번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쓰마 번 번교藩校가 바로 번사의 양성을 위한 기관으로 이름을 조사관造士館이라 했다.
위 그림에서 선성전宣成殿이라는 것이 보이는데 여기는 공자를 모신 곳으로 성균관의 대성전에 해당한다.
오른쪽에 앙고문仰高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문을 통하면 선성전까지 외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 좌우측에 학생들의 교육공간이 보인다.
강당이 있고 문고, 도서실이 있다.
그리고 선성전 옆에는 학료, 학생들의 기숙 공간이 있다.
이 사쓰마 번교는 3천400평 규모로 시작했다가 4000평 정도를 추가하여 유도, 궁술 훈련장까지 더하였다.
막말 메이지시대 사쓰마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모두 이 번교를 거쳤다.
이 사쓰마번 번교가 메이지 유신 이후 제7고등학교가 되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1773年(安永2年)- 鹿児島藩主・島津重豪에 의해 「造士館」 창설.
1871年(明治4年)- 廃藩置県에 의해 藩校가 폐지됨
1884年(明治17年): 전 사스마 번주의 청에 의해 사쓰마 번교에 - 「鹿児島県立中学造士館」이 설치됨.
1887年(明治20年): 동 학교를 「鹿児島高等中学造士館」로 바꿈.
1901年(明治34年): 第七高等学校造士館이 설치됨.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쓰마번 번교의 부지와 재산이 메이지 정부에 그대로 승계되어 이를 바탕으로 제7고등학교가 성립샂다는 점이다.
개항 초기 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메이지 정부는 다음 전략에 의해 일본의 교육제도를 완성해갔다.
1. 기존의 "막부 창평판학문소昌平坂学問所" (우리의 성균관에 해당)를 (동경)대학으로 전환.
2. 기존 번교 중 가능한 것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로 전환.
3. 기존의 데라코야를 적극적으로 "소학교"로 전환.
등이다.
신정부 교육제도를 완성하는 데 있어 기존 교육제도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부족한 돈을 메꾸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사에서 본다면,
성균관이 서울대가 되고,
서원과 향교가 중학교나 고등학교가 되며,
서당이 소학교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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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舊制 제7고등학교가 된 사쓰마 번교薩摩藩校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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