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중국 사천성이 무너졌다.
이해 5월 12일 오후 2시28분에 발생한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 희생자는 사망자가 약 6만9천 명이요 부상자가 약 37만4천 명, 행방불명자가 약 1만8천 명에 붕괴 가옥은 21만6천 동이라 하니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내 기억에 구조 활동에는 한국 사람들도 깊숙이 관여했으며, 그 직후 중국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 이명박은 현지를 찾아 구조활동을 응원하기도 했다.
이런 자연의 대참사에는 으레 그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을 즈음에는 문화재 피해 상황에 대한 후속보도가 따르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 발생 얼마 뒤 문화재 역시 피해가 적지 않다는 외신 인용 보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중 내 기억에 가장 생생한 문화재 피해 현장이 도강언都江堰이라는 곳이었다.
전국시대 진秦 왕조 촉군蜀郡 태수 이빙李泳이 그의 아들과 더불어 만들었다는 대규모 수리시설로 사천성 수도 성도에 위치한다.
민강岷江이 범람하면서 일어나는 홍수를 이 관개시설 공사로 막았다고 하거니와, 더구나 그런 시설이 후대의 적지 않은 개보수가 있었겠지만 2천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 꿋꿋하게 전하니 그 희귀성 혹은 역사성은 두 말이면 잔소리다.
한데 이번 지진으로 도강언은 심대한 손상을 봤다 하며, 더불어 그 근처 이빙 부자를 기리는 사당인 이왕묘二王廟와 후한시대 장도릉이 도교를 창건한 역사적 시발점인 명산 청성산靑城山 일대 건축물을 비롯한 적지 않은 문화재 현장이 지진의 마수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해외 사건은 언론사에서는 중국 특파원이라든가 언론사에서는 외신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전담하는 일이 통례지만, 오지랖 기질이 발동하는 다른 부서 기자도 가끔은 있기 마련이다.
그 희생자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대참사에 나 역시 한 다리 걸쳐볼까 하며 기웃대는 기자도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를 남들의 비극에 편승하는 반휴머니즘적 작태라 욕을 퍼부어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아는 기자다.
이런 기질 없이 좋은 기사 쓰는 기자 못 봤다. 참사 현장을 보고 울기는 기자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렇다고 기자가 하염없이 시신이나 유가족을 부여잡고 언제까지 목 놓아 같이 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 몫이다.
나 역시 이 사건에 그랬다. 어떻게 하면 한 다리 걸쳐볼까 이리저리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관련 기사를 검색하고, 주로 외신을 통해 타고 들어오는 관련 외신 사진을 검색해 봤다.
그러면서 빌었다. 부디 내가 다녀왔고, 훌륭한 사진을 남긴 문화재 현장이 붕괴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그래야 그 피해 문화재의 참사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는 기사를 ‘멋진’ 사진을 곁들여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왕이면 사천성을 대표하는 낙산대불樂山大佛이 포함되었으면 하기도 했다. 그 몇 해 전에 성도를 중심으로 문화재 답사를 한 적이 있고 그에서 낙산대불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 기억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끝내 사천성 대지진 참사에 한 발짝도 들여다 놓지 못했다. 낙산대불은 끄떡없었고 그 몇 해 전 답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만 도강언은 빠뜨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얼마 뒤 나는 몇몇 지인과 여름 휴가를 빌려 해외답사를 가게 되었다. 답사지 선정을 두고 이전투구가 벌어졌는데 나는 사천성을 주장했다.
다행히 내 편이 이겨 수은주 최고 사십도를 오르내린다는 그 성도로 찾아 떠났다. 이때 나는 비로소 내 눈으로 도강언을 봤다.
그 감격이야 말할 수 없이 컸다. 막대한 피해를 봤다지만 도강언은 여전히 굳건하게 살아 있었다. 살아줘서 한없이 고마웠다.
돌이켜 보면 내가 성도를 고집하고, 더구나 도강언을 답사지에 넣은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대지진에서 비롯한다. 이때가 아니면 내가 영영 도강언을 볼 날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조급함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문화재 현장이 어디 한둘인가? 당장 내 시대에, 더구나 내가 문화재 전문 기자로 이름께나 알리기 시작하던 무렵에 저 유명한 바미안 석불이 사라졌다.
그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지만, 그런 그리움을 뒤로하고 탈레반의 폭음 속으로 연기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근자 어떤 외신 보도를 언뜻 보니 일본 문화재 복원팀에서 그 일부를 복원했다는 말이 들리지만, 순도가 반감 혹은 급감되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라지는 모든 과정은 언제나 애처롭다.
무너졌으면 했던 그 마음과 막상 용케도 살아남은 그것을 보고 감격에 겨운 그 마음이 한 사람 가슴에서 나왔다.
전자가 기자의 ‘곤조’이며 후자가 ‘혼네’라 스스로 변명해 본다. (2016.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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