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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 기자 17년] (3) 범어사 천왕문 방화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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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버린 범어사 천왕문

 

하도 이곳저곳 싸질러 대서 언제 어디에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한 가지는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며, 그것도 자주였다는 사실이다.

남들 보기에 내가 가 본 데가 많은 듯하지만 내가 가지 않은 곳이 훨씬 많다. 부산 범어사도 가보지 못한 곳 중 하나였다.

나는 1993년 1월 1일자로 기자 생활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이후 6개월의 이른바 수습 기간이 채 끝나기 전인 그해 6월 1일자로 부산지사로 발령 나서 내 기억에는 이듬해 7월1일자로 다시 서울 본사로 발령 나서 체육부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경상도 출신이라 하지만 부산은 나에겐 생명부지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되, 이곳에서의 생활 13개월을 나는 유배 생활에 견줄 정도로 고통 그 자체였다.

 

범어사 천왕문 화재 현장



그런 까닭에 당시엔 내가 문화재엔 관심이 아주 없었거나, 지금보다는 훨씬 덜한 시절이니, 범어사를 찾을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어찌하면 이 지긋지긋한 롯데 자이언츠의 도시를 탈출하느냐 하는 꿈만 꾸던 시절이다.

부산 사람이라면 으레 가 볼만 한 범어사를 내가 가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범어사가 전연 나에겐 미답지로 계속 남아있던 2010년 12월 중순, 이상한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이르되 이달 15일 밤 10시쯤 이곳 천왕문이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서 건물 전체가 전소됐다는 것이다.

천왕문은 아다시피 사찰 경내 중심을 이루는 대웅전 구역으로 통하는 입구에 버티고 선 문지기를 모신 곳이니, 우락부락 네 형제가 대체로 전면 1칸 측면 1칸 건물 안에 통로 양 옆을 버티고 선 조각을 말한다.

불교에 조금은 무지하거나, 그것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타도 대상 1호가 사천왕이다.

화재 진압을 위해 소방 당국은 소방차 30여 대와 소방관 70여 명을 투입한 진화에 나섰지만 숭례문 방화 사건이 그랬듯이 불이 기와지붕 밑 적심까지 붙어 결국은 3시간 만에 전소에 가까운 피해를 봤다.

숭례문의 기억이 생생했던 데라 건물을 부순 다음 진화에 나섰다는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그나마 이곳에 봉안한 사천왕상은 곧바로 경내 성보박물관으로 옮겼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범어사 천왕문 화재현장



기록에 의하면 범어사 천왕문은 조선 중기인 1699년 건립된 이래 여러 차례 개보수가 있었으며 현재의 천왕문은 1964년 복원품이다. 1989년 전면 보수가 있었다가 이 사건으로 다시금 개창하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자체 문화재가 아니기는 했지만 그것이 위치한 곳이 보물 1461호인 일주문을 지나 불이문으로 가는 중간이라는 점에서 하마터면 또 초대형 문화재 방화사건으로 번질 뻔했다.

이후 이 사건에 어떤 내력이 있는지 내가 알 바 없지만, 나는 방화범이 그래도 문화재를 고려했다고 본다. 유독 문화재가 아닌 신축 건물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런 그에게도 숭례문 방화 사건의 잔상이 짙게 있었다고 믿고 싶다.

어떻든 이렇게 소실된 천왕문은 2012년 3월에 다시금 복원됐다.

애초 이 사건을 접했을 적에 이는 방화이며 그 소행은 불교를 증오하는 특정 종교 신봉자일 것이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일었다고 기억한다. 특정 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개독’으로 승천을 거듭한 기독교를 말한다.

 

범어사 천왕문 화재 현장



한데 내가 그 당시 이런 의심이 압도적일 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숭례문 방화의 여파가 지대했던 때라, 엉뚱한 분풀이 대상으로서의 방화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지만, 내부 갈등에 따른 사건이리라는 심증이 어떤지 강하게 일어났다. 내가 아는 방화사건이 거의가 그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실은 나를 일깨웠다. 뭐 거창한 대오각성이 아니다. 앞서 사천성 도강언에 얽힌 기억에서 얘기했듯이 이러다가 범어사도 내가 한 번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었다.

사건 직후 짬을 내서 가보겠다 했다. 하지만 당시에 내가 답사에 정신이 팔렸을 때임에도 도통 기회가 닿지 않았다.

이런 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기회가 우연히 오게 마련이다. 아다시피 지난해 연말, 나는 3개월간의 휴직 끝에 회사에 복직하려 했지만, 또라이 연합뉴스 경영진이 그것을 막았다.

이 사건을 접한 김해의 인제대 중문학과(학과 이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홍상훈 교수가 같은 대학 사학과 이영식 교수와 짜고서 해고자한테 용돈벌이 해 주겠다면서 학기말 시험을 코앞에 두고서도 이 대학 특강 자리를 급히 마련하고는 나를 연사로 부른 것이다.

 

범어사 천왕문 화재현장



특강은 이날 오후 3시 무렵에 시작하는 두 시간짜리가 아니었나 하는데, 이때라고 하면서 냅다 이날 오전 일찌감치 부산으로 내려갔다. 범어사를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범어사를 가게 되었거니와, 겨울 초입 범어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진 곳이었다. 그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그것을 감싼 저 산꼭대 정상을 올려다보니, 저기에서 내려다 보면 범어사 경내가 다 들어오겠다고 해서 사찰 감시인이랄까 안내원이랄까 하는 노년의 남자한테 물어보니 저기가 포토 존이라 했다.

하지만 그곳에 오를 시간이 없었다. 마침 그날은 김해로 넘어가기 전 영도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 김윤아를 찾아가기로 약속을 한 마당이라, 도저히 오를 시간이 없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남들 보기에는 내가 특혜를 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재 담당 기자로서 호식한다고 보일 수도 있으리라. 실제 그런 측면이 있거나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도강언이랑 범어사로 굳이 얘기를 시작하는 까닭은 그것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느 분야가 그러하듯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일의 원동력은 열정이라고 나는 믿는다. 누군가가 미쳐야 미친다 했는데, 문화재 역시 미쳐야 한다.

내가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는 그랬던 거 같다. (2016.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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