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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미술사가 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1919~2009)의 학적 편력

by taeshik.kim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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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호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이며 이화여대 교수와 홍익대 교수를 거쳐 훗날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는 그의 회고록 겸 수필집인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시공사, 1998, 2 초판1쇄) 에서 저자 스스로가 밝힌 이력을 정리한다. 

다만 이 이력이 백퍼 팩트라고는 확신할 수는 없다. 기억 착란이 있을 수 있고 분식 또한 없다 장담해서도 안 된다.

함에도 식민지시대, 특히 그 중기에 태어나 태평양전쟁기 무렵에 대학생활을 보낸 인텔리겐차 전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의 이력은 주시해야 한다. 

이에 의하면 그는 1919년 2월 17일(음력인지 양력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 이학순과 어머니 진보배의 장남으로 인천 화평동 3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유성에서 터전을 삼았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이규보가 어렸을 적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그의 어머니(저자한테는 증조모)가 이를 피하겠다며 아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피난하게 되면서 그의 집안은 인천을 터잡게 된다. 

찢어지게 가난했다가 1923년 다섯살 되던 무렵에 집이 인천시 경동 100번지로 이사하게 되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밀가루와 국수 도매상을 하게 되면서 부자가 되니 이를 발판으로 이경성은 동시대 같은 세대와는 현격히 다른 고등 교육의 길에 들어선다. 

1926년 8살에 인천 창영보통학교에 입학해 1931뇬 13세에 졸업하고는 장사를 해야 한다는 아버지 뜻에 따라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당시 시험 두 과목 국어(아마 일본어가 아니었을까 싶다)와 산수 중 산수에 낙제해 불합격되고 다시 창영보통학교 6학년에 머물면서 1년을 재수한다.

본래 졸업 때는 6학년 1반이었다가 재수 때는 3반이 된다. 

1년 뒤 다시 같은 학교에 응시했다가 다시 낙방. 더는 창영보통학교에 머물 수 없어 인천 내동 감리교 계통 영화보통학교라는 사립학교에서 삼수를 하고는 1933년 세번째로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다시 낙방한다. 


1932년 16세 때 석남


1년 뒤인 1934년 숭문중학교 전신인 경성상업실천학교에 입학한다. 3년제인 이 학교는 전국 낙제생들이 모이는 학교였다고. 

1936년 18세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아버지 장사를 돕다가 어느날 동경 일본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던 장분석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어 동경으로 문학을 공부하러 가야 한다는 꾐을 받던 차 마침 그가 가져다 둔 동경 명치대학 입학원서를 보게 된다.

하지만 중학교 3년 졸업이라 본과에 들어갈 수는 없어 별과에 지망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다 1939년 19세에 배를 타고 인천에서 부산,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다음, 다시 그에서 동경까지 특급 기차를 타고 동경에 입성하니 그해 2월 무렵이었다. 목표는 명치대학 문학부. 

전보로 나 가니 마중나오라 한 이는 장분석이었지만, 엇갈려서 그의 친구로 같은 인천 출신으로 미술을 공부하던 이남수가 마중 나와 이를 인연으로 그가 살던 와세다대학 인근 아파트에 동거하게 된다. 이를 통해 미술을 접한다. 


와세다 시절 석남



본래는 메이지대학이 목표였지만, 친구한테 매료되어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에 응시해 합격한다. 이 학교 다니면서 밤에는 동경추계상업학교 수업을 듣는다.

이 상업학교 1년을 마치면서 그 졸업장을 얻어 이를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제출함으로써 본과생이 된다. 

이렇게 2년 정도 고등문과시험이라는 목표를 향한 공부가 계속된다. 하지만 미술에 빠져들어 법률은 이내 포기하고 미술비평이나 미술사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모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는 졸업시험을 끝내자마자 귀국한다. 하지만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에는 어머니가 자궁암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다시 동경으로 가겠다는 계획은 일단 좌절하게 된다. 

징용을 피하고자 경성지방법원 서기로 취직한다. 

일단 고비를 넘기고는 1942년 12월, 고등문관시험을 치러 간다고 아버지를 속이고, 또 재산소도 속여 도강증을 받아 동경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어 그 이듬해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미술사를 공부하겠다고 응시해 합격한 듯하다. 

하지만 이 생활도 불과 두 달만에 끝나고 만다. 동경 공습이 나날이 심해진 데다가 학병에 끌려갈 처지로 몰린다. 이에 1943년 가을 다시 귀국한 그는 학병에 지원하라는 형사들 등살에 시달리다가 일본으로는 왜 갔느냐는 취조까지 당한 모양이라, 이때 도강증을 증거로 내밀면서 시험치러 간 것이라 둘러댔다 한다. 

학병은 어케든 벗어났지만 징용이라는 난관을 또 넘어야 했다. 이에 인천 만석동에 있는 조선기계제작소에 취직해 이른바 현원징용이 됨으로써 징용을 벗어난다.

이런 방식의 징용 혹은 학병 회피 수법은 고선박 연구를 개척한 김재근 회고록에도 드러난다.

이 기계제작소에서는 서무과에서 일했다. 그러면서 아마 해방을 맞은 듯하다.  

이런 이력에서 주목할 대목이 많거니와 첫째 전염병이 부른 인구이동이 있고, 둘째 태평양전쟁 말기 징용 혹은 학병을 피하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나아가 대학 진학을 위한 눈물겨운 투쟁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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