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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마질차] (4) 형수가 되었을 여인을 노리는 시동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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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여인이 누굴까?



그때 태손太孫 소명전군昭明殿君이 이미 태어난 상태였고, 무열제는 (며느리인) 자의慈儀의 현숙함을 매우 아꼈다. (27세 흠돌欽突 전)

그때란 26세 풍월주인 진공이 흠돌한테 풍월주 자리를 물려준 때다. 이때가 656년 태종무열왕 재위 3년째다. 따라서 이로 보면 문무왕 김법민과 그의 정비 자의 사이의 맏이인 소명태자는 656년 혹은 그 직전에 태어났다.

소명을 전군이라 부르는 까닭은 아직 정식 왕자 혹은 태손으로 임명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전군은 정식 왕자보다는 한 등급 낮은 왕의 아들을 지칭하는 호칭이다. 

이 두 가지 증언과 삼국사기 김흠운 열전을 종합할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대 의문이 있다.

앞서 보았듯이 김흠운은 655년 백제와의 조천성 전투에 출전했다가 장렬히 전사했고, 그때 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지만 죽고 나서야 제7등 일길찬一吉飡으로 높여진 것으로 봐서 보나마나 죽을 때 낭당대감은 제8등 사찬沙飡이었다. 

그 자신이 (태종무열) 대왕의 반자半子, 곧 사위라 했으니, 죽을 때 나이는 20대, 혹은 많아 봐야 30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위의 딸을 맞손주 며느리로 삼으로 했다? 뭔가 이상하다. 죄책감? 미안함? 이런 걸로는 언뜻 설명되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사위가 아니라 딸에 해답이 있다. 김흠운한테 출가한 딸, 그 딸이 김춘추로서는 그렇게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딸이 느닷없이 청상과부가 되어 어린 딸을 둔 싱글맘이 되었거니와, 물론 당시 시대 추세로 봐서는 다른 데로 개가하거나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기는 했겠지만, 그런 딸에 대한 애틋함이 커서 그 딸의 딸을 장차 며느리로 삼으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간단히 말해 외손녀랑 친손자를 백년가약으로 맺어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김춘추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게 믿은 친손자, 곧 내 다음다음 보위를 이을 것으로 기대한 그 친손자 원손이 그만 허망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허망하기는 그와 정혼한 외손녀도 마찬가지였다. 결혼도 못 해 보고선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린 것이다. 

이때 이 맹랑한 어린 여식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카드를 들고 나온다. 

"전 앞으로 결혼 안하고 생평을 처녀로 늙어 죽을 때까지 제 정혼자를 위한 사당을 지키면서 살끼라요."

이 모습이 얼마나 장래의 시어머니가 되었을 자의태후가 보기엔 대견했겠는가? 

그래? 수절한다고? 그래서 죽은 내 아들 영혼을 계속 위로하겠다고? 그래라. 

하지만 수절을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한창 물이 오르기 시작한 젊은 처자를 누가 가만 두겠는가? 그를 노린 남자는 의외로 빨리 나타났다. 

그것도 정혼자가 죽지 않았음 시동생이 되었을 그의 동생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 동생이 죽은 형을 대신에 원손에 책봉되니 그가 바로 훗날 신문왕이 되는 김정명金政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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