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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민둥산과 사투를 벌이는 조선총독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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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소산 송월대送月臺. 건너편 산은 전부 민둥산이다.

 
2. 임업

개설
조선에서 삼림·산야는 총면적이 1,600만여 정보로, 전 토지의 7할 이상을 점하고 있다. 또 반도의 기후는 남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북쪽의 한대에서 남쪽의 온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수목이 자란다. [97] 따라서 삼림·수목의 종류가 풍부하여 그 수가 700종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예로부터 임정林政이 갖추어지지 못해, 임야의 사점私點56)을 금하였다.

이에 특수 보호림인 봉산封山·금산禁山 등을 제외하고는 무주공산無主公山이라 하여 인민들 의 자유 채초採樵57)를 방치하며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은 제멋대로 남벌濫伐하 거나 화전火田을 함부로 경작하고 조금도 식재植栽 보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는 보호림 제도도 폐지되어 임야의 대부분이 극도로 황폐해졌고, 예전 유명했던 삼림도 민둥산(禿山·赭丘)으로 변하였으며, 오직 교통이 불편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지방과 보호가 엄중한 능陵·원園·묘墓 부속지와 기타 다소의 예외지에서만 삼림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만약 큰비가 내리면 순식간에 물이 범람하고, 나아가 산업의 발달을 저해 하고 국토의 안전을 손상시키는 등 그 재앙이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따라서 이의 복구·개선책을 강구하는 것은 실로 초미의 급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국유國有·사유私有의 경계가 불분명해서, 국가와 인민이 모두 권리의 행사에서 상당한 불편을 느끼고 있었다.
 

개성 고려 태조왕건 현릉. 그나마 산림이 보존된 데는 이런 데 뿐이었다.



1) 삼림령과 임야조사
이러한 이유에서 구한국정부는 1907년 처음으로 농상공부에 임업과를 설치하고, 모범림과 묘포苗圃를 설치하여 식림殖林의 장려를 꾀하였다.

다음 해인 1908년에는 ‘삼림법’ 이하 여러 법령을 공포하여 삼림 행정에 관한 근본 방침을 정하였다. 특히 삼림법 내에 보안림保安林 제도를 명확히하여 성림지成林地의 보호에 노력했다.
 
또 1910년(明治

56) 개인적으로 점유하는 것.
57) 땔나무를 베어 두었다가 마른 뒤에 거둠.
 
43. 이상 99쪽) 3월부터 8월까지의 6개월간 반도 전 지역에 걸쳐(제주도와 기타 해도海島를 제외함) 간단한 임적조사林籍調査를 실시하여, 비로소 그 대략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실로 최초로 근세近世 임정林政에 착수한 것이다.

병합 후인 1911년(明治 44) 6월 삼림법을 폐지하고, 새로 ‘삼림령’을 제정하여 9월 1일부터 이를 시행하였다.

이에 총독부 임정의 근본 방침을 수립하고, 보안림·영림감독營林監督, 조림대부造林貸付, 입회관행入會慣行, 기타 불요존임야不要存林野 처분 등의 제도를 만들었다.

여기서 영림감독이란 종래 완전히 방임되고 있었던 사유私有 임야에 대해 조림을 명하거나 [98] 개간을 금지·제한하는 등 임정林政상 필요한 명령을 발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조림대부란 국유國有로 존치할 필요가 있는 임야에 조림 사업을 장 려하는 취지에 따라, 조림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대부하여 사업 성공 후 이를 양여讓與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국유·사유의 구별과 국유임야 중 존치할 필요가 있는 것과 존치할 필요가 없는 것의 구별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생겨, 1911년(明治 44)부터 소위 국유림의 구분 조사에 착수했다.

이 조사는 1924년(大正 13)에 이르러 일단 완료되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 존치할 필요가 있는 국유임야는 519만 정보(후 468만 정보로 감소), 존치할 필요가 없는 국유임야는 151만 정보가 되었다.

이 밖에 사유임야는 그 지역의 부락민이 점유한 공유公有, 사찰 및 개인 소유를 포함하여 합계 1,023만 정보에 이르렀는데, 삼림령(1926년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을 추가)에 의하거나 기타 특별 처분에 따라 장래 민유民有로 이속시켜야 할 임야로서 사유임야는 점차 그 면적이 증가할 예정이다.
 

개성 숭양서원. 노거수가 있는 이유는 따질 필요도 없다.


2) 성림지의 보호
반도의 산야는 앞서 서술한 것처럼 황폐하다고 해도, 압록강·두만강 연안의 삼림 지대를 비롯하여 기타 산악·도서에 삼림이 존재하는 곳도 있고, 그 외 여러 곳에 방풍 림防風林·풍치림風致林 또는 어부림魚付林 58) 등으로 존치시켜야 할 것도 약간 있었기 때문에 극력 이들 성림지成林地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58) 어류의 유치와 증식을 위해 조성한 숲. (이상 100쪽
 

3) 조림 장려와 애림 사상의 환기
인공 조림은 1907년(明治 40)에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우선 모범림을 설치하여 교통이 빈번해서 가능한 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지점에 식림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방침 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그해 국비로 먼저 경성의 백운동白雲洞(창의문의 서쪽)과 평양의 모란대牡丹臺 두 곳에서 사업을 개시하였다. 

그중 백운동은 경성 북서쪽 성벽을 따라서 완전히 모래산과 같은 무입목지無立木地59)였기 때문에 우선 사방공사砂防工事를 시행한 후 여기에 숲을 조성했다. 이것이 사방공사의 효시이다. 

또 묘포를 수원·대구·평양의 3곳에 설치하고, [99] 기술자를 파견해서 각 묘포에 파종하는 한편 내지에서 1·2년생  묘목을  구입·이식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관영 모범 조림은 병합 직전에 면적 500여 정보, 식재 묘목 180만 그루에 이르렀다.

1910년(明治 43) 신관제 시행과 함께 묘포는 도道로 이속시켰으며, 그 경영은 국비에서 지불하고 그 수를 더욱 늘려 8곳으로 하였다. 그리고 조림은 국비로 하는 것 외에도 각 도 지방비와 면에서 모범적으로 실행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 지방비 및 부·군 임시 은사금으로 경영하는 수묘포樹苗圃를 각지에 설치하여 수묘樹苗를 무상 배부하는 한편, 기술원을 배치하여 식림 사업을 지도하게 하였다.

특히 존치할 필요가 없는 국유임야의 대부 제도는 조림 장려에서 큰 효과를 거두었다.

또 1911년(明治 44) 4월 3일 진무神武 천황天皇 제일祭日을 맞아 관민의 구별 없이 일제히 기념식수를 행하는 의식을 가졌고, 기타 인쇄물 등을 통해 애림愛林 사상의 환기에 힘썼다. 그 결과 반도의 산야도 해가 갈수록 녹화되기에 이르렀다.

다음으로 삼림 보호와 관련해서는 삼림령을 통해 사용 수익에 관한 폐해의 교정, 해충의 구제·예방, 화입火入60) 제한, 도벌盜伐 방지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였다. 또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국유임야를 보호하게 하고, 그 보수로 임산물林産物의 일부를 양여하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자치적으로 삼림조합을 지도·감독하여 해충 구제, 화재 방지 등을 위해 노력하게 하는 등 힘써 그 실행에 임하였다.


59) 나무를 심어 산림을 조성할 예정이나 현재는 나무가 서 있지 않은 지대.
60) 산야 · 목초지 등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마른 풀이나 관목을 불태우는 일. (이상 101쪽)
 

의주 전경. 보다시피 민둥산 천지다.


 
4) 조선 국유삼림 미간지 및 삼림 산물 특별 처분령
국유삼림 산물의 처분에 대해서는 이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1912년(大正 元年) 8 월 칙령으로 ‘조선 국유삼림 미간지 및 삼림 산물 특별 처분령’을 공포하여 일반 회계 법에 따르는 것 외에 수의계약隨意契約에 의거하는 길을 넓혀 인민의 이익과 편익을 도 모하기로 했다.

5) 영림창
요존치要存置 예정 국유임야는 시정 이후 총독부 직할인 것과 영림창營林廠 소관인 것이 있었다. 총독부 직할에 속한 308만 정보는 각 도청에서 이를 보호·감독하였다. 

그런데 총독부 직할 임야 가운데 [100]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의 3도에 걸치는 압록강·두만강의 두 유역에 속한 약 211만 정보에 대해서는 1908년(明治 41) 군용목재창軍用木材廠의 뒤를 이은 통감부 영림창과 한국 서북 영림창을 신의주에 설치하고, 한·일 양국 정부가 공동 출자하여 경영했다.

1910년(明治 43) 병합과 동시에 새로 관제를 발포하여 조선총독부 영림창으로 고치고, 본창本廠을 신의주에, 지창支廠과 출장소를 상류의 중요한 곳에 설치하여, 벌목·조재造材·운재運材·제재製材·판매·임산물 처분 및 국유림 조사 등 삼림 경영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

조선총독부 영림창의 작업에는 가능한 한 조선인을 고용하여 생업을 주는 방침을 채택했지만, 조재, 제재, 목재 양륙揚陸61)·집적 등과 같이 기술 또 는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작업에는 이를 감당할 만한 조선인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중국인을 고용했다.

또 벌부筏夫62)는 내지인을 많이 고용하고 있다. 목재의 판매는 당초 군용재軍用材를 위주로 했던 관청용재官廳用材의 공급만 있었지만, 점차 일반 수요에 부응하는 것으로 되어 본창本廠과 회령출장소에서 판매 사무를 취급했다.

그 판매 성적은 해마다 양호해서, 1916년(大正 5)에는 수지차익금이 51만 5,000여 원에 달하였다.

또 조선총독부 영림창 작업은 종래 조선 삼림 특별회계에 따라 경영해 왔지만, 경영상의 이해를 고려하여 1916년(大正 5)부터 총독부 특별회계에서 경리하기로 했다.


61) 배에 실려 있는 짐을 뭍으로 운반하는 것을 말한다.
62) 산에서 반출한 목재로 뗏목을 만들어 하천으로 이를 띄워 내려 보내는 사람.
 
6) 대학 연습림
이상의 사업 외에 1912년(大正 元年)부터 국유림의 일부를 각 제국대학에 대부하여, 그 연습림演習林으로 경영하게 했다. 그 수와 면적은 아래와 같다.

단, 수원농림전문학교와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은 제3기 사이토齋藤實 총독 시대에 속하지만, 편의상 여기에 함께 표시한다. [101] (이상 102쪽)
 
대학연습림

제국대학명 대부 개소 대부 허가 연월 총면적
 
東京帝國大學
강원도 고성군 水洞面, 전라남도 ·광양군 白雲
·峰· 지리산
 
1912 12
 
46,685
 
帝國大學
전라 남원군, 경상남도 함양군, · 지리산 · 昌元里· 九楊里  
1912 12
 
16,906
帝國大學 전라 무주군 덕유 · 哲木里 1913년 9월 16,505
 
九州帝國大學
경상남도 하동, 지리산 · 大成· 凡旺里 1912 12  
21,675
함경 무산군 閔峰· 支峰 1926년 1월
수원농림학교 전라 전주군 威鳳 1919년 5월 2,675
    104,44863)

(이상 103쪽

 

출처 :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김민석·최은진·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

 

민둥산을 개혁하고자 조선총독부는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이 사업이 어느 정도 혹은 대성공한 것처럼 그들은 말하지만, 일부에서는 성공작이라 할 만한 데도 없지 않았지만, 이 일은 훗날 박정희 시대에 와서야 가능했다. 

아무튼 저 민둥산 문제는 총독부가 당면한 가장 큰 골치 중 하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저 처철한 싸움을 식민지배통치니 하는 거지발싸개 같은 논리를 덧씌워서 읽어야 하겠는가? 그건 식민지배고 나발이고 뭐고 위정자라면 당장 해결해야 하는 그런 문제였다. 산림녹화는 그만큼 시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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